침묵의 소리 2007. 2. 21. 13:02



Theosophical University Press Online Edition
THE VOICE OF THE SILENCE

By H. P. Blavatsky

AND OTHER CHOSEN FRAGMENTS
FROM THE "BOOK OF THE GOLDEN PRECEPTS."
FOR THE DAILY USE OF LANOOS(DISCIPLES).
TRANSLATED AND ANNOTATED BY "H.P.B."


FRAGMENT III
THE SEVEN PORTALS

단 편3

일곱 개의 관문

299.
Not so when he hath crossed
and won the Aryahata Path.

그러나 아라한(阿羅漢)의 길을 지나
그 길을 쟁취한 자에게는 아직 그렇지 못하나니...

(원저자주)

From the Sanscrit Arhat or Arhan

Arahat : "worthy one";

one who has attained no more learning.

300.
There Klesha is destroyed for ever,
Tanha's roots torn out.
But stay, Disciple . . . Yet, one word.
Canst thou destroy divine COMPASSION?
Compassion is no attribute.
It is the LAW of LAWS
-- eternal Harmony, Alaya's SELF;
a shoreless universal essence, the light of everlasting Right,
an fitness of all things, the law of love eternal.

그곳에서 즐거움을 탐하는 모든 마음인
'클레샤(Klesha)'가 영원히 없어지고
생의 의지인 '탄하(Tanha)의 뿌리들이 완전히 뽑혀진다.
하지만 제자여 기다려라.
아직 남아있는 마지막 한마디 말을...
그대는 신성한 자비의 열정을 부술 수 있는가?
자비는 어떤 속성이 아니니라.
자비는 위대한 법 중에서 가장 위대한 법이니라.
거룩하고 영원한 조화
순수한 빛인 알라야(Alaya)의 본체(大我)
끝없는 우주의 정수(精髓)
영원한 정의(正義)의 빛
모든 만물의 바탕인 적합성 그리고
영원한 사랑의 위대한 법칙
이것이 바로 자비이다.

(원저자주)

Klesha is the love of pleasure or of worldly enjoyment, evil or good.
클레샤(Klesha)는 선하든, 악하든, 모든 종류의 세속적 쾌락을 좋아하는 것이다.
Tanha, the will to live, that which causes rebirth.
탄하(Tanha)는 환생의 원인인 살려는 의지이다.

301.
The more thou dost become at one with it,
thy being melted in its BEING,
the more thy Soul unites with that which IS,
the more thou wilt become COMPASSION ABSOLUTE.

그대가 자비와 하나가 되면 될수록
그대의 존재는 자비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그대의 참된 영혼이 참으로 실재하는 그것과 하나가 될수록
그대는 '완전무결한 자비' 그 자체가 되리니...

(원저자주)

This "compassion" must not be regarded in the same light as "God,

the divine love" of the Theists.

Compassion stands here as an abstract, impersonal law whose nature,

being absolute Harmony, is thrown into confusion by discord, suffering and sin.
여기서 말하는 '자비(Compassion)'는 유신론자들이 말하는 신,

신성한 사랑과 같은 의미로 보면 않된다.

여기서의 자비는 추상적이며 초월적인 법으로,

그 성질은 절대적인 조화이지만 불화나 고통 그리고 죄에 의해 혼란에 빠진다.

302.
Such is the Arya Path, Path of the Buddhas of perfection.

바로 이것이 성스러운 "아라야(Arya, 神性)의 길"
완전한 부처님의 성스러운 길이다.

303.
Withal, what mean the sacred scrolls which make thee say?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성전(聖典)의 두루마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304.
"Om! I believe it is not all the Arhats
that get of the Nirvanic Path the sweet fruition."

"옴! 나는 이제야 모든 아라한들이
열반의 길의 감미로운 결실을 얻는 것이 아님을 믿는다."

305.
"Om! I believe
that the Nirvana-Dharma is entered not by all the Buddhas".

"옴! 나는 이제야 모든 위대한 아라한들이
열반의 법(Dharma)에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믿는다."


(원저자주)
In the Northern Buddhist phraseology all the great Arhats,

Adepts and Saints are called Buddhas.
북방불교에서는 위대한 아라한, 초인 및 성자들을 부처라고 부른다.
[*Thegpa Chenpoido, "Mahayana Sutra,"

Invocations to the Buddhas of Confession," Part I., iv.]

306.
"Yea; on the Arya Path thou art no more Srotapatti,
thou art a Bodhisattva. The stream is cross'd.
'Tis true thou hast a right to Dharmakaya vesture;
but Sambogakaya is greater than a Nirvanee,
and greater still is a Nirmanakaya -- the Buddha of Compassion.

"그렇다.
아라야(神性)의 길에 들어선 그대는
이제 그대는 더 이상 열반의 길로 나아가는 구도 수행자인
스로타파티(Srotapatti)가 아니라 보살이다.
이제 그대는 시냇물을 건넜다.
이제야 그대는 다르마카야(法身佛, 毘盧遮那佛)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진정한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삼보가카야(報身佛, 阿彌陀佛)가
열반(Nirvanee)보다 더 위대하고,
자비의 부처님이신 니르마나카야(化身佛, 觀世音菩薩)가 훨씬 더 위대하다.

(원저자주)

A Bodhisattva is, in the hierarchy, less than a "perfect Buddha." In the exoteric parlance these two are very much confused. Yet the innate and right popular perception, owing to that self-sacrifice, has placed a Bodhisattva higher in its reverence than a Buddha.
보살은 서열상 '완전한 부처'보다 낮지만 고결한 자기 희생 대문에 세인들로부터 부처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는다.

This same popular reverence calls "Buddhas of Compassion" those Bodhisattvas who, having reached the rank of an Arhat (i.e., having completed the fourth or seventh Path), refuse to pass into the Nirvanic state or "don the Dharmakaya robe and cross to the other shore," as it would then become beyond their power to assist men even so little as Karma permits. They prefer to remain invisibly (in Spirit, so to speak) in the world, and contribute toward man's salvation by influencing them to follow the Good Law, i.e., lead them on the Path of Righteousness. It is part of the exoteric Northern Buddhism to honour all such great characters as Saints, and to offer even prayers to them, as the Greeks and Catholics do to their Saints and Patrons; on the other hand, the esoteric teachings countenance no such thing. There is a great difference between the two teachings. The exoteric layman hardly knows the real meaning of the word Nirmanakaya -- hence the confusion and inadequate explanations of the Orientalists. For example Schlagintweit believes that Nirmanakaya-body, means the physical form assumed by the Buddhas when they incarnate on earth -- "the least sublime of their earthly encumbrances" (vide "Buddhism in Tibet") -- and he proceeds to give an entirely false view on the subject. The real teaching is, however, this: --

The three Buddhic bodies or forms are styled: --

1. Nirmanakaya.

2. Sambhogakaya.

3. Dharmakaya.

The first is that ethereal form which one would assume when leaving his physical he would appear in his astral body -- having in addition all the knowledge of an Adept. The Bodhisattva develops it in himself as he proceeds on the Path. Having reached the goal and refused its fruition, he remains on Earth, as an Adept; and when he dies, instead of going into Nirvana, he remains in that glorious body he has woven for himself, invisible to uninitiated mankind, to watch over and protect it.

Sambhogakaya is the same, but with the additional lustre of "three perfections," one of which is entire obliteration of all earthly concerns.

The Dharmakaya body is that of a complete Buddha, i.e., no body at all, but an ideal breath: Consciousness merged in the Universal Consciousness, or Soul devoid of every attribute. Once a Dharmakaya, an Adept or Buddha leaves behind every possible relation with, or thought for this earth. Thus, to be enabled to help humanity, an Adept who has won the right to Nirvana, "renounces the Dharmakaya body" in mystic parlance; keeps, of the Sambhogakaya, only the great and complete knowledge, and remains in his Nirmanakaya body. The esoteric school teaches that Gautama Buddha with several of his Arhats is such a Nirmanakaya, higher than whom, on account of the great renunciation and sacrifice to mankind there is none known.

"자비의 부처"는 네 번째 또는 일곱 번째 길을 지나서 아라한의 서열에 도달했으나, 열반으로 들어가지 않고 혹은 다르마카야 옷을 입고 피안으로 건너가길 거부한 보살들이다. 카르마가 허락하는 한 조금이라도 인류를 돕기 위해 그렇게 되었다. 그들은 말하자면 영(spirit)의 상태로 인간의 눈에 보이니 않게 속세에 남아서 팔정도와 같은 대법을 따르도록 감화시킴으로써 중생을 구원하는 데 공헌한다. 그리스인들이나 카톨릭 교도들이 그들이 성인이나 수호자들에게 기도를 올리듯이, 현교적 북방불교에서도 성자들과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경배하고 그들에게 기도를 하는 것도 관례이다. 반면에 비교의 가르침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 두 가르침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서, 현교적 가르침을 따르는 속인들은 니르마나카야의 진정한 의미를 거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동양학자들의 혼돈과 잘못된 설명들이 있는 것이다. 슐라킨트바이트는 니르마나카야를 부처가 속세에 환생할 때 취하는 형상 -세속적 장애물 중에서 가장 덜 숭고한 것- 이라고 믿었다. 참된 의미는 다음과 같다:
부처의 세가지 형태 혹은 몸은 아래와 같다.
1. 니르카나카야(Nirmanakaya) - 화신불
2. 삼보가카야(Sambhogakaya) - 보신불
3. 다르마카야(Dharmakaya) - 법신불
첫 번째는 인간이 초인의 모든 지식을 가지고 육체를 떠나서 아스트랄체로 나타날 때 취하는 에테르적인 형체이다. 보살은 도의 길을 걸으면서 이것을 내면에서 개발해간다. 목적지에 도달해 그 결과를 거부하고, 속세에 초인으로 남게된다. 그가 죽을 대 열반으로 들어가지 않고, 인류에게는 보이지 않는, 자신이 직접 짠 영광스러운 체 속에 남아서 인류를 보호하게 된다. 삼보가카야도 마찬가지이나, '세 가지 완성'의 광채가 추가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모든 세속적 관심사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다르마카야는 완전한 부처로, 어떤 몸이 아니라, "이상적인 숨결"이다. 우주의식에 융합된 의식, 혹은 어떤 속성도 없는 혼이다. 일단 다르마카야가 되면, 초인이나 부처는 모든 가능한 속세와의 인연 혹은 속세에 대한 생각을 버린다. 이와 같이 중생을 돕기 위해서 열반의 권리를 얻은 초인은 신비적인 말로 '다르마카야의 몸'을 포기한다. 그리고 삼보가카야의 위대하고 완전한 지식에 취하고, 니르마나카야 몸으로 남은 것이다. 비교의 가르침에서는 고타마 붓다와 그의 몇몇 아라한들이 바로 이런 니르마나카야로, 중생을 위한 포기와 희생 때문에 그들보다 더 고귀한 존재는 없다고 가르친다.

(역자주)

Dharmakaya :
The true nature of Buddha, transcendental reality, essence of the universe.
Sambogakaya : body of buddha-paradise buddha
Nirmanakaya : the earthly body of a buddha.

법신불 (法身佛, 毘盧遮那佛)
진리를 인격화한 불신(佛身). 초기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하면 석가모니 한 사람을 의미하였으나,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에 부처에 대한 신격화가 이루어졌다. 부처가 된 석가모니는 일시적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이며, 사실은 영원한 과거에 있어서 이미 성불(成佛)을 완성하고 무수한 시간에 걸쳐 인간들을 교화해온 구원실성(久遠實性)의 부처가 있었음을 주장하였다. 이 부처를 구원의 법신불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불교가 법(法)을 신앙하는 것이고, 법을 깨달은 진리와 일체요 영원불멸하는 법신이라고 본 것이다. 한국에서는 법신을 설명함에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설을 인용하는데 신라의 원효(元曉)는 법신에 대해 ① 큰 지혜요 광명이며 ② 세상의 모든 대상계를 두루 남김없이 비추어 모든 것을 다 알게 되는 것이며 ③ 있는 그대로를 참되게 하는 힘을 간직하고 있으며 ④ 맑고 깨끗한 마음을 본성으로 하고 있으며 ⑤ 영원하고 지복하고 자유자재하고 번뇌가 없으며 ⑥ 인과(因果)의 법칙에 의해 변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중생의 마음을 통해서만 증득(證得)될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한국에서는 법신불이라 하면 비로자나불을 뜻하게 된다. (출처 : 야후백과사전)

비로자나불 (毘盧舍那佛)
《화엄경(華嚴經)》의 교주. 비로자나란 <빛나는 것>을 뜻하며, 원래는 태양의 빛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나 뒤에 불교의 근원적인 부처라 했다. 노자나불(盧舍那佛)·자나불이라고도 하며, 편일체처(遍一切處)·광명편조(光明遍照) 등으로 한역된다. 이 부처는 무한한 과거로부터 무량무변의 수행을 쌓아 깨달음을 얻은 부처(報身)이며, 석가의 깨달음의 경지를 불격화한 것(法身)이다. 형상은 천엽연화(千葉蓮華)의 단상에 앉아 왼손은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가볍게 들고 있다. 법상종(法相宗)에서는 비로자나·노자나·석가를 자성(自性)·수용(受用)·변화의 삼신(三身)으로 해석하고, 천태종(天台宗)에서는 법신·보신·응신(應身)의 삼신으로 나누어, 비로자나와 석가가 동체(同體)임을 설명한다. 한국의 사원에서는 이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는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대광명전(大光明殿)·비로전·화엄전이라 하며, 이 비로자나불상 뒤에는 비로자나후불탱화가 봉안되는데, 이 곳에는 보통 화엄경의 설법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아미타불 (阿彌陀佛)
대승불교의 부처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처.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미타(彌陀)라고도 한다. 이 부처의 신앙을 중심으로 하여 성립된 것이 정토교(淨土敎)이다. 아미타(阿彌陀)란 이름은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나타내는 산스크리트 아미타유스(amit?yus)와 아미타브하(amit?bhas)의 한역(漢譯) 음사(音寫)이다. 아미타불의 기원은 처음에는 모두 석가모니를 표현한 것이었지만, 후대에 와서 석가모니를 다른 각도에서 영구히 표현한 것으로 추측되며 이를 보살사상(菩薩思想)의 견지에서 설법함으로써 아미타불은 석가모니가 대승불교 보살의 이상상(理想像)으로 직시되고 구원불로 존숭되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 등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세자재왕불(世子在王佛)이 출현했을 때 법장(法藏)이라는 보살이었으나 무상의 깨달음을 얻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전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본원(本願)으로서 48대원(四十八大願)을 세우고 5겁(五劫) 동안 수행을 거듭한 결과 서원과 수행을 성취하여, 지금으로부터 10겁이라고 하는 오랜 옛날에 부처가 되어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10만억불토(十萬億佛土) 떨어진 안락(安樂)이라고 하는 정토(淨土)에서 교설(敎說)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뭇 생명있는 자들은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통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위없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데, 이 모두가 아미타불의 본원에 근거한 것이다. 이 밖에도 많은 대승경전 속에 관설(關說)되어 있는 가르침은, 특히 중국·한국·일본 등지에서 염불을 통하여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여 깨달음을 얻는 불교의 일대 계통을 이루게 되었다. 한국의 아미타불에 관한 신앙은 6, 7세기 무렵 신라(新羅)의 원효(元曉)에 의하여 널리 보급되고 체계화되었다. 그는 정토교의 보급을 위하여 각처를 다니면서 미타염불을 권장하였으며 그의 뒤를 이어 수많은 교학승(敎學僧)들도 미타신앙 전파에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의 현실은 사람들을 미타신앙에 귀의하게 했으며, 얼마 안 가 곳곳에 수많은 아미타불상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그 뒤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미타사상은 선(禪)과 융합되어 지눌(知訥)·보우(普愚)·나옹(懶翁)·기화(己和)·휴정(休靜) 등의 고승을 통하여 맥이 이어져 내려와 침체된 불교계에 신앙의 불을 밝히기도 하였다.


관세음보살 (觀世音菩薩, Avalokitesvara)
자비를 덕으로 삼고 가장 널리 믿어지고 있는 보살. 관음·관자재(觀自在)·광세음(光世音)·관세자재(觀世自在)·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라고도 한다. 《무량수경(無量壽經)》을 보면, 이 보살은 <극락정토(極樂淨土)>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협시(脇侍)로서 부처의 교화를 돕고 있는데 단독으로도 신앙의 대상이 되어 중생이 괴로울 때 그 이름을 외면 그 음성을 듣고 곧 구제한다고 한다. 관세음은 세간의 음성을 관(觀)한다는 뜻이고, 관자재라 함은 지혜로 관조(觀照)하므로 자재한 묘과(妙果)를 얻는다는 뜻이다. 또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無畏心)을 베푼다는 뜻으로 시무외자(施無畏者)라 하고, 자비를 위주로 하므로 대비성자(大悲聖者)라 부르며, 세상을 구제하므로 구세대사(救世大士)라고도 한다. 이 보살이 세상을 교화함에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여러 가지 형체로 나타난다.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하는데, 33신(身)이 있다.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데 이 꽃은 중생이 원래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나타내며,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 성불(成佛)한 것을 뜻하고, 그 봉오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 그 형상을 달리함에 따라 육도(六道)의 중생을 제도하는 성관음(聖觀音)·천수(千手)관음·마두(馬頭)관음·십일면(十一面)관음·준지 관음·여의륜(如意輪)관음 등 6관음으로 나뉘는데, 그 중 성관음이 본신이고 그 밖의 것은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다. 그 정토, 또는 있는 곳을 보타락가(補陀落迦;Potalaka)라고 하나, 본래 《화엄경(華嚴經)》에 남인도의 마뢰구타국을 보타락가라고 한 것이 처음이며, 중국에서는 저장성[浙江省(절강성)]의 저우산열도[舟山列島(주산열도)]를 보타락이라 한다.


보신불 (報身佛)
삼신(三身)의 하나. 수용신(受用身)이라고도 한다. 보신은 보살이 바라밀을 수행하여 서원(誓願)이 완성됨에 따른 보과(報果)로써 얻어지는 것이며, 이상적인 부처이다. 한국에서 믿는 보신불은 아미타불과 약사여래 등이다. 원효(元曉)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 따르면 보신불은 다음 세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첫째, 본행(本行)이다. 보신불의 경지를 실현한 이들은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여러 바라밀행을 실천하여 모든 중생을 받아들인다. 둘째, 중생들을 고통과 죄악 세계에서 건져 자유롭게 하되, 영원무궁토록 그렇게 하기로 서원을 크게 세운다. 셋째, 모든 중생과 자신은 하나이므로 중생을 자기 몸 같이 보며, 번뇌가 많은 중생이라 하여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보신을, 수행으로 얻은 불과(佛果)와 법문을 스스로 수용하고 즐기는 자수용신(自受用身)과, 법문을 다른 사람을 지도하고 교화하는 타(他)수용신으로 나누기도 한다. (출처 : 야후백과사전)


307.
Now bend thy head and listen well, O Bodhisattva
-- Compassion speaks and saith:
"Can there be bliss when all that lives must suffer?
Shalt thou be saved and hear the whole world cry?"

오, 보살이시여.
이제 머리를 숙이고 귀를 기울여 잘 들으십시오.
위대한 자비로움은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
거기에 지극한 축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자신만이 구원을 받아
온 세상이 울부짖는 것은 그대로 듣고 있을 것인가?"

308.
Now thou hast heard that which was said.

이제 그대는 그 말을 분명히 들었느니라.

. . . . . . .


309.
Thou shalt attain the seventh step
and cross the gate of final knowledge but only to wed woe
-- if thou would'st be Tathagata,
follow upon thy predecessor's steps,
remain unselfish till the endless end.

그대는 일곱 번째 단계를 성취하고,
최후의 지식의 문을 지나가면
그대는 오직 비애(悲哀)와 결합하게 되리니.
만일 그대가 타타가타(如來)가 되고자 한다면
앞서간 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끝없는 끝이 올 때까지
이타적인 상태로 계속 지내야 하느니라.

310.
Thou art enlightened -- Choose thy way.
. . . . . .

그대는 깨달았다.
그러니 이제 그대의 길을 선택하라.


311.
Behold, the mellow light that floods the Eastern sky.
In signs of praise both heaven and earth unite.
And from the four-fold manifested Powers a chant of love ariseth,
both from the flaming Fire and flowing Water,
and from sweet-smelling Earth and rushing Wind.

동쪽 하늘에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빛을 보라.
하늘과 땅이 하나같이 모두 그대를 칭찬한다.
활활 타오르는 불과 흐르는 물
감미로운 향을 내는 땅과 힘차게 부는 바람인
네 가지 현현된 위대한 힘(四大元素)들로부터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312.
Hark! . . .
from the deep unfathomable vortex of that golden light
in which the Victor bathes,
ALL NATURE'S wordless voice in thousand tones ariseth to proclaim:

들어라.
승리자가 헤엄치는
황금빛의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소용돌이로부터
모든 대자연의 소리 없는 소리가 수천 수만가지 소리로
이렇게 그대를 칭찬한다.

313.
JOY UNTO YE, O MEN OF MYALBA .

오, 미얄바(俗世, 사바세계)의 중생들이여!
그대들에게 기쁨을...

(원저자주)

Myalba is our earth -- pertinently called "Hell,"

and the greatest of all Hells, by the esoteric school.

The esoteric doctrine knows of no hell or place of punishment

other than on a man-bearing planet or earth. Avitchi is a state and not a locality.
미얄바(Myalba)는 비교학파에서 말하는 '지옥'으로

모든 지옥들 중에 가장 지독한 지옥이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속세를 말한다.

비교의 가르침에서는 인간이 살고 있는 속세를 제외하고

어떤 처벌을 받는 장소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비치(Avichi)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상태이다.

314.
A PILGRIM HATH RETURNED BACK
"FROM THE OTHER SHORE."

피안(彼岸)으로부터 순례자가 돌아왔다.

315.
A NEW ARHAN IS BORN. . . .

드디어 새로운 아라한(聖人, 羅漢)이 탄생하였다.

(원저자주)

Meaning that a new and additional Saviour of mankind is born,

who will lead men to final Nirvana i.e., after the end of the life-cycle.
인류를 궁극의 니르바나로 이끌 새로운 인류의 구원자가 탄생하였다는 의미이다.


316.
Peace to all beings.

모든 존재들에게 참된 평화가 깃들기를...

(원저자주)

This is one of the variations of the formula

that invariably follows every treatise, invocation or Instruction.

"Peace to all beings," "Blessings on all that Lives,"
모든 소론이나 가르침 혹은 기도문에 따르는

여러 가지 형태의 상용구 중에 하나다.

예를 들면, '모든 생물에 축복을' 등등.

(역자주)

요용어 해설

Amitabha Buddha : Buddha associated with mercy and wisdom.
Four noble truths :
1 Life is suffering
2 Suffering is caused by desire
3 There is a path from desire and suffering
4 This path is the Eightfold Noble Path.
Karma : universal law of cause and effect.
Koan(公案) : "Public case", a pure presentation of the nature of ultimate reality.
Kshitigarbha Bodhisattva : Savoir from the torments of hell.
Prajna : Wisdom of true mind
Tathagata : nature of a buddha;

one who has followed in the steps of his predecessors

THE END

영어원문출처사이트

http://www.phx-ult-lodge.org/avoice.htm
http://www.theosociety.org/pasadena/voice/voice.htm

처음번역 : 김은경

http://cowhiterose.net/main_esoterics.htm

영한대역재편집 및 평역: 푸른글

posted by 푸른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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