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릴지브란의 1933년 작품

<예언자의 정원> 번역 후기

나는 무척 게으른 사람이다.
그리고 책읽기를 좋아하는 것과 밥 잘먹는 것을 빼고 나면
특별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내가 나의 블로그에 번역한 글을 자주 올리므로
내가 무척 영어나 한자를 잘 하는 사람일 것이며
부지런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오산이며
그들이 생각하는 나와 실제의 나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먼저 나는 한글 전용화 교육으로 한자가 학교수업의 정규시간에서
빠진 시대에 학교를 다녔으므로 한자(漢字)에 아주 무지한 문외한인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대학 토목과를 나와서 근 20년 간을 흙먼지 날리는
도로공사 현장에서 살아 온, 속칭 남들이 말하는 노가다이다.
그러므로 나의 영어실력 또한 형편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나의 번역 속도는 무척 느린 편이다.
나는 영어사전과 국어사전 옥편을 옆에 두고 한자 한자 더듬어가며
찾고 그 어휘의 바른 뜻을 살피며 글들을 번역한다.
그리고 많은 글들을 번역해보려고 욕심을 내다보니
내가 번역으로 소모하는 시간이 아주 많을 수 밖에 없다.

그 시간들은 내가 TV나 신문과 거의 담을 쌓고 지내는 덕 일수도 있고
내가 근 30년간을 새벽 2시 이전에 잠들어 본적이 없는
특이체질을 가진 탓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특별한 날이 아니면 내 개인적인 시간 대부분을
번역작업과 책읽기로 보낸다.
물론 그것이 남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의 번역작업이 전혀 돈을 염두에 두고 하는 작업이 아니라는
것으로 본다면 남을 위해 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칼릴지브란을 영적으로 이해하며
그의 글을 번역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 말의 뜻은 내가 당연히 칼릴지브란만큼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어야
그의 글 속에 담긴 뜻들을 바르게 옮길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어원본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쉽게 칼릴지브란의 작품을 번역해 보려는
나의 이번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이번에 내가 새롭게 번역을 시도한
칼릴지브란의 1933년 작품 <예언자의 정원 : The Garden of The Prophet>은
내가 이미 새롭게 번역한 그의 작품 <광인> <예언자>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고 <눈물과 미소>의 글들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작품이었고
나의 이해 수준을 이미 넘어선 글이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깨달음의 스승 알무스타파는
그의 작품 <예언자>에 등장했던 그 알무스타파가 아니다.
이 작품은 칼릴지브란 자신이 스스로의 깨달음에서 얻은 것을
스스로 예언자가 되어 말하고 있는 글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의 알무스타파는 칼릴지브란 바로 그 자신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작품에서는 작가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스승으로써 예언자로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예수가 13제자를 골랐듯이
이 글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 이 글을 썼고
그러므로 그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일 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에게 무자비한 작품이다.
그러므로 나의 번역작업도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리고

이 <예언자의 정원>을 번역하는 동안에
나에게는 예기치 않은 수많은 일들이 계속 생겼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나의 무지로부터 비롯된 슬픔과 공포와의 싸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였고 아직도 나의 그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

칼릴지브란의 작품 <예언자의 정원>은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교적인 것에 더 가까운 글이다.
그의 작품 <광인>과 <예언자>가 기존 기독교 신앙을 바탕에 두고
기독교 안에서 참된 신앙을 모색하는 수도승의 길이었고,
그의 작품 <사람의 아들 예수>가 끝없는 심연 앞에서 있는
자기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으로
그 길을 새롭게 모색하고 찾아가는 구도자의 길을 다룬 작품이었다면
이 <예언자의 정원>은 칼릴지브란이 자신을 낳고 키워준
기존의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나 다시 진정한 예수의 모습을 찾은
기쁨을 노래하며 비상하는 중에 보고 느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는 작품인 것이다.
......


그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아주 이상한 징크스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떤 글을 번역하려고 할 때에는
아니 번역해야만 하는 사명이 주어지게 될 때에는
내 앞에는 그 글을 번역하기 위한 수많은 기초자료들이
저절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번에 2,000년 만에 새로 발견된 <유다복음서>를
내가 번역하기 전에도 그랬고, 이 작품 <예언자의 정원> 번역중에도
나는 그 징크스를 전율하도록 무서운 두려움과 함께 느꼈다.
그리고 내가 이 책의 번역을 꼭 마쳐야 한다는 심한 압박을 받았다.

내가 이 책의 번역을 중도에 그만두려고 할 때
내 앞에 우연히 나타났거나 다시 읽게 된 책들을 몇 가지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청담스님이 쓴 <금강경 대강좌> <유다복음서> <도마복음서>
구르지예프의 가르침을 담은 P.D 우스펜스키의 <위대한 가르침을 찾아서>
토트의 <에메랄드 타블렛> A.N 화이트 헤드의 <열린사고와 철학>
중국의 지혜 <증광현문>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
조셉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성철스님의 <이 뭐꼬>
<사하라의 노래> <마하무드라의 노래> 알란 와츠의 <물질과 생명>
가스통 바술라르의 <촛불의 미학>과 <꿈꿀 권리> 그리고 <물과 꿈>
<바가바드 기타> <리그베다> 바짜야나의 <카마수트라>
미하일 나이미의 <미르다드 의 서> 혜암스님 편역 <선문촬요>
<태을진경> 칼릴지브란의 <부러진 날개>등등이다.

그리고 내가 이 책들을 최근에 미리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 작품의 번역에서 수많은 오류를 범했을 것이라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었다.

.........

그동안 나는

칼릴지브란의 모습을 시인으로 고정시켜 보아왔다.
하지만 <예언자의 정원>을 번역하고 난 후
나에게는 칼릴지브란이 시인이 아니라 깨달음의 길을 비추는
등대이자 스승으로써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깨달음에 대한 아주 어려운 이야기를
시를 통해 산문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
시인의 모습을 빌린 예언자였던 것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보고 아는 것에 대해 남에게 쉬운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 자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

책을 번역하면서 기쁨을 느낄 때는 그 책의 글 하나 하나가
그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으로 다가올 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이번 번역 작업은
근래에 벼랑에서의 추락과 비상을 반복하고 있던 나에게
칼릴지브란이 준 선물이었으며, 참으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그동안 나는 수많은 책들을 읽어왔지만 나의 독서는
읽고 생각하는데 까지 였다.
그러나 내가 번역을 하면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처럼 글자 한자 한자씩을 적어가면서
읽고 생각하고 느끼는 독서의 행복함이다.

이제 내가 느낀 그 느낌을 다른 이에게 전하게 된다는 기쁨도
또 하나의 기쁨인 시간이 다가왔다.
아무쪼록 내가 칼릴지브란의 이번 작품 <예언자의 정원>을
번역하면서 느낀 행복함을 내가 번역한 글들 속에서 나의 이웃님들이
느끼기를 바란다.

하지만 피곤하다.
나는 왜 이렇게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돈도 안되는 짓을...
차라리 이렇게 번역을 하는 시간에
참선이라도 더 열심히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인지...
아 부질없는 일이로다.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는 이 일은.....

이제는 잠자리에 들어야 겠다.

4339년 5월 2일 새벽 1시 47분
경남 진주에서 푸른글

@COPYLEFT

제가 평역한 글들은 덧글이나 저의 동의없이 가져 가셔도 좋고 

상업적 목적외에는 출판 편집 등 어떠한 형태로든지 마음대로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너무 많이 편집하셨을 때는

평역자인 저의 이름을그대로 넣어 사용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푸른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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