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사상/열자 2020. 7. 2. 21:42

初, 子列子好遊. 壺丘子曰: “禦寇好遊, 遊何所好?”

列子曰: “遊之樂, 所玩無故.

人之遊也, 觀其所見; 我之遊也, 觀之所變.

遊乎遊乎! 未有能辨其遊者.”

壺丘子曰: 

“禦寇之遊固與人同歟, 而曰固與人異歟?

凡所見, 亦恆見其變.

玩彼物之無故, 不知我亦無故. 務外遊, 不知務內觀.

外遊者, 求備於物; 內觀者, 取足於身.

取足於身, 遊之至也; 求備於物, 遊之不至也.”

於是列子終身不出, 自以爲不知遊.

壺丘子曰: “遊其至乎! 至遊者不知所適;

至觀者不知所[目+氐], 物物皆遊矣, 物物皆觀矣,

是我之所謂遊, 是我之所謂觀也.

故曰: 遊其至矣乎! 遊其至矣乎!”

처음에 열자는 밖으로 나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러자 그의 스승인 호구자(壺丘子)가 말했다.

“그대는 무엇이 좋아 그렇게 나돌아다니며 놀기를 좋아하는가?”

열자가 대답했다.

“돌아다니며 노는 것의 즐거움은 제가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감상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노는 것과 제가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만 보지만

저의 노는 법은 모든 현상의 변화하는 모습을 깊이 관찰하는 것입니다.

그들이나 저나 다 노는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노는 법이 어떻게 다른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자 호구자가 말했다.

“내가 듣기에는 그대가 노는 태도도 남과 매한가지인데, 왜 그대만이 다른 듯이 말하는가?

눈에 띄는 대로 보는 것도 사물의 변화하는 모습을 파악하는 일이 아니라고는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지금 보는 사물의 상태도 조금 전의 상태와는 다르며,

또 조금 뒤의 모습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대는 객관적인 세계가 시시각각 변화하는 줄은 알고 있지만,

그대 자신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다.

그러기에 외부의 세계 속에서 놀고자 할 뿐,

자기 자신의 내면의 변화를 관조하려고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외부 세계에서 노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객관적인 사물 속에서 만족을 찾지만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서 만족을 찾는다.

그러니 자기 속에서 만족을 찾는 것이야말로 가장 잘 노니는 태도가 아닐 수 없고,

외부의 사물 속에서 만족을 구하는 것은 잘 노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감명을 받은 열자는 죽을 때까지 밖에 나돌아다니지 않았으며

자신이 전혀 노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호구자가 말했다.

“유유자적하게 노닌다는 것은 아주 높은 경지라 할 것이다.

정말 놀 줄을 아는 사람은 어디를 찾아다니며 노는 법도 없고

진정으로 관조할 줄 아는 사람은 구태여 외부의 사물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이 모두 다 노닐고 있고,

모두 다 관조하고 있거니와, 새삼 무엇에 노닐며 무엇을 본단 말인가.

그러므로 안과 밖, 주관과 객관의 한계가 없어진 사람에게는

모두가 노니는 것이 되는 것이니,

내가 노닌다, 관조한다 하는 의미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닌다는 것은 아주 높은 경지로다. 아주 높은 경지로다.”

하고 한 것이다.   

子列子曰: 

“得意者無言, 進知者亦無言. 用無言爲言亦言, 無知爲知亦知.

無言與不言, 無知與不知, 亦言亦知.

亦無所不言, 亦無所不知; 亦無所言, 亦無所知.

如斯而已. 汝奚妄駭哉?” 

열자가 말했다.

“뜻을 얻은 자는 말이 없고,

궁극의 이치를 다 아는 사람 역시 말이 없는 법이다.

그러나 그 쓰임으로 본다면 말 없음 역시 말이며, 앎 없음 또한 앎인 것이다.

또한 말없음이 높은 경지라 하여 말을 하지 않고

앎 없음이 도(道)라 하여 알지 않으려고 한다 해도

이것 역시 말이요, 앎인 것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도인은 말없음과 앎 없음을 체득하고 있을 뿐

그것에 구애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무슨 말이나 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되며

무엇 하나 모르는 것이 없지만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경지가 이러한데 너희가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楊朱曰 : “百年壽之大齊. 得百年者, 千無一焉.

設有一者, 孩抱以逮昏老, 幾居其半矣.

夜眠之所弭, 晝覺之所遺, 又同居其半矣.

痛疾哀苦, 亡失憂懼, 又幾居其半矣.

量十數年之中, 逌然而自得, 亡介焉之慮者, 亦亡一時之中爾.

則人之生也, 奚爲哉? 奚樂哉? 爲美厚爾, 爲聲色爾.

而美厚復不可常厭足, 聲色不可常玩聞.

乃復爲刑賞之所禁勸, 名法之所進退, 遑遑爾競一時之虛譽,

規死後之余榮, 偊偊爾愼耳目之觀聽,

惜身意之是非, 徒失當年之至樂, 不能自肆於一時.

重囚累梏, 何以異哉?

太古之人, 知生之暫來, 知死之暫往,

故從心而動, 不違自然所好, 當身之娛, 非所去也, 故不爲名所勸.

從性而遊, 不逆萬物所好, 死後不名, 非所取也, 故不爲刑所及.

名譽先後, 年命多少, 非所量也.”

양주가 말했다.

“기껏 살아보았자 백 년을 넘기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며

실제로 백 살을 넘긴 사람이란 천 명중에 한 사람도 되지 않는다.

설혹 백 살까지 사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갓난애의 시기와 늙어서 정신이 혼미한 시기가 거의 생애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리하여 나머지 50년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밤에 잠자는 시간과 낮에 깨어있으면서도

멍청하게 보내는 시간이 거의 그 절반이나 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나머지 25년도 병과 슬픔과 걱정과 근심

그리고 두려움 따위가 그 반은 차지한다.

이렇게 따지고 나면 남는 것은 겨우 수십 년에 불과한 바,

그것도 유유자적하여 아무런 근심도 없는 때는

채 한 시간도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고 보면 사람이 산다 하지만

결국 무엇을 하고, 무엇을 즐긴다는 것일까?

기껏해야 잘 입고 잘 먹고 음악을 듣고 미인을 즐기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그 잘 입고 잘 먹는 것도 언제까지나 충족된다고 할 수 없고,

음악과 미인(美人)에 있어서도 그 사정은 같다.

거기에다가 형벌과 상(賞)이 우리를 구속하고 명예와 법에 얽매이게 된다.

그리하여 허겁지겁 한 때의 헛된 명예를 다투기도 하고,

사후(死後)의 영광을 도모하기도 한다.

겁을 먹어 눈과 귀(耳目)의 욕구를 삼가고,

자신의 시비(是非)의 판단까지도 제대로 내리지 못해서,

인생에 주어진 즐거움조차 잃어버리고

한 때도 뜻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족쇄를 차고 있는 죄인과 무엇이 다른가?

옛 사람들은 생(生)이란 이 세상에 잠깐 와서 머무는 일이요,

죽음이란 저 세상에 잠깐 가는 일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음을 따라 행하여 좋아하되

자연의 도리를 어기는 법이 없었고

몸에 닥쳐오는 즐거움을 억지로 거스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선(善)을 행하되 명예가 따르지 않을 정도만 하고

타고난 본성에 따라 행동하여 만물의 좋은 점을 거스르지 않았다.

또한 죽은 뒤의 헛된 이름을 구하지 않았으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더라도 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 하였고

앞선 명예나 수명의 길고 짧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았다.

嚴恢曰 : “所爲問道者爲富, 今得珠亦富矣, 安用道?”

子列子曰 : “桀‧紂唯重利而輕道, 是以亡. 幸哉余未汝語也!

人而無義, 唯食而已, 是雞狗也. 彊食靡角, 勝者爲制, 是禽獸也.

爲雞狗禽獸矣, 而欲人之尊己, 不可得也. 人不尊己, 則危辱及之矣.”

엄회(嚴恢)가 말했다.

“도를 배우려는 것은 실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재물을 얻어도 부자가 될 수 있는데

도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열자가 대답했다.

“걸임금과 주임금도 이익만을 추구하고 도를 무시하다가 망했거니,

내가 그 이야기를 너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구나.

사람이 의로움을 모르는 채 먹고살기만 한다면,

닭이나 개와 무엇이 다르랴?

힘으로 먹을 것을 다툰 끝에 이긴 자가 지배하는 것은,

바로 금수와 같은 짓이다.

금수같은 짓을 한다면 남의 존경을 받으려 해도 안될 것이며,

남이 존경해 주지 않는다면

위험과 모욕밖에 닥칠 것이 더 있겠느냐?“

posted by 푸른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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