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상/달마 관심론 2008. 9. 30. 00:03



安心法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법문

- 菩提達磨大師
보리달마대사

편안한 마음[安心]은 지혜의 눈[慧眼]이 열리는 데서 얻어진다.
- 안심법문

마음은 물질이 아니므로 있다고 할 수도 없지만
마음씀이 그치지 않으니 없다고 할 수도 없다
마음을 쓰지만 항상 비어 있으니 실체가 있다고 할 수도 없다
텅 비었지만 항상 마음씀이 있으니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다.

마음 마음 하는 그 마음 찾을 길 어려워라.
너그러울 땐 법계를 덮지만 좁아지면 바늘 끝도 용납치 않네.
나는 본래 구하는 마음으로 부처를 찾은 적 없나니,
삼계(三界)가 비어서 아무것도 없음을 아노라.
만약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단지 마음만을 찾아라.
마음 마음 하는 이 마음이 바로 부처로다.
내가 본래 찾는 마음도 마음이 스스로 가지고 있나니,
찾는 마음으로 마음 알기를 바라지 말라.
불성(佛性)은 마음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니,
마음이 일어나는 그 때가 바로 죄가 생기는 때이니라.

慧可曰:「諸佛法印,可得聞乎?」
達磨祖師曰:「諸佛法印,匪從人得。」
慧可曰:「我心未寧,乞師與安。」
祖曰:「將心來,與汝安。」
慧可良久曰:「覓心了不可得。」
祖曰:「我與汝安心竟。」

1
迷時人逐法,解時法逐人。解時識攝色,迷時色攝識。

미혹할 때는 이쪽이 상대적인 것, 생각하는 것에 졸졸 따라다니고,
깨달았을 때에는 상대적인 것이 흡입되어 이쪽의 것이 되어 버린다.
깨달을 때는 이 쪽의 마음의 움직임에로 밖의 대상이 포섭되어 들어오고
미혹할 때는 오히려 바깥 대상에 의해 이쪽의 움직임이 좌우된다.

2
但有心分別計校 自心現量者,悉皆是夢。
若識心寂滅,無一切念處,是名正覺。

자기의 마음(自心)라는 것이 있다면, 분별하여 여러 가지로 計較한다.
이것이 有心이다. 自心現量이다.
이 分別計較에서 나온 것은 모두 꿈이요, 현실성을 갖고 있지 않다.
이 분별하는 有心의 근본바탕이 寂滅하여
計較의 한 생각도 움직이지 않을 때가 올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이다.
한 생각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원적·대상적으로 사물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사스런 寂靜이 아니다.

3
問云 何自心現量。
答 見一切法有,有不自有,自心計作有。
見一切法無,無自不無,自心計作無。
乃至一切法亦如是。 是自心計作有,自心計作無。

<자심현량>이란 어떠한 뜻입니까?
우리들은 보통 말하기를 사물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하는데,
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은
有가 스스로 有하지 않고 無가 스스로 無한 것이 아니다.
이쪽의 마음에서 有無를 計較하기 때문에
有가 있고 無가 있는 세계가 가능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분별하고 計巧하는, 그 마음에서 유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유와 무는 대상적 논리의 소산이다.
유와 무가 각기 별도로 독립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것이나 상관적 존재인 까닭에
그것이 그것을 분별하는 자심을 떠나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분별에 분별 없는 것, 즉 일념부동의 세계에 바른 깨달음이 있다.

4
又若人造一切罪 自見己之法王卽得解脫。

또,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죄업을 지은 게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 죄업을 이룬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별이 주가 되며, 유무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그 유무를 초월한 것, 다시 말해서 법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라고 생각될 때(天上天下 唯我獨尊의 뜻)
해탈에로의 길이 열린다.

5
若從事上得解者氣力壯。從事中見法者 卽處處不失念。
從文字解者氣力弱。

불교에서는 理와 事를 나누어 설명한다.
理는 개념적 보편성의 이치이고, 事는 個多的 특수성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 경험 위에서 깨달음을 얻고 법을 체득하는 사람은
그 得力에 있어서 대단하게 보아야 할 점이 있다.
오가며, 머물며, 앉고 잠자는 온갖 동작 위에서
그 깨달음을 항상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단순한 개념이라든가 문자 위에서만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그 힘이 자연히 미약함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6.
卽事卽法者 深從汝種種運爲。 跳 顚蹶。悉不出法界。
亦不入法界。 若以法界入法界。卽是癡人。

事 위에서 깨달음을 얻고
겸하여 그것이 법의 이치에 투철히 계합하였다고 한다면,
무엇을 하려고 하더라도 - 춤을 추든 광대노릇을 하든 간에 -
법계 밖으로 벗어나는 일도 없거니와
법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일도 없다.
이런 사람은 법계와 함께 運爲하고 행동하는 자이기 때문에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문제는 여기엔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밖에서 법계를 보려고 하기 때문에,
본래 거기에 있는 사물에 대하여 출입의 분별관을 세우고
그것으로 자타의 행동을 규제하려고 한다.
미혹은 바로 여기서부터 생겨난다.

7.
凡有所施爲。 終不出法界心。 何以故。心體是法界故。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法界心 밖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법계를 본체로 삼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마음이 법계요, 법계가 마음이므로
이 마음의 작용은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법계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세계를 두고 이르는 말이라 해도 좋다.

8.
問。 世間人種種學問。 云何不得道。
答。 由見己故不得道。 己者我也。 至人逢苦不憂。 遇樂不喜。
由不見己故。所以不知苦樂者。
由亡己故。得至虛無。己自尙亡。 更有何物而不亡也。

「세상 사람들은 각자 개성에 맞게 여러 가지로 학문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를 얻는다는 것은 너무나 드문 일입니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자기〉라고 하는 것을 보고있기 때문이다.
자기란 곧 〈나[我]〉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쩌구 저쩌구〉하는 그 〈나[我]〉이다.
至人은 고통스러운 경계나 즐거운 대상에 처하더라도
별로 근심하거나 기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과 환희가 있더라도 그것을 자기중심적인 입장에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없어진 것이다.
無의 경지를 완전히 깨달은 자는 어떠한 환경에 놓여있더라도
거기에 지배를 받아 좌우되는 일은 없는 것이다.」

* 慧朗 禪師가 스승인 石頭希遷 禪師를 모시고 있다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자네에게는 불성이 없네.」
「그렇다면 우리가 벌레라고 부르는 것들에게는 있습니까?」
「그런 것들에게야말로 불성이 있지.」
「저에게는 없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것이다 하고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지.」

9.
問。諸法旣空。阿誰修道。
答。有阿誰。 須修道。 若無阿誰。 卽不須修道。 阿誰者亦我也。
若無我者。 逢物不生是非。 是者我自是。 而物非是也。
非者我自非。而物非非也。

묻기를「모든 법이 이미 空하다고 한다면 아무도 없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를 닦는 사람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도를 닦는 사람 역시 모든 법 속에 포함되니까요.」
답하기를「누군가가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원래부터 도를 닦아야 하겠지만,
만일 아무도 없다고 한다면 도를 닦는다든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누군가>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我]>의 의미이다.
<내>가 없고 <자기>가 없다고 한다면 온갖 경계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는 생각을 품지 않는다.
그것은 옳다 그르다 하는 가치판단은 이쪽에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바로 그것이 하는 일이다.
사물, 즉 대하는 경계[對境]가 스스로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대하는 경계 그 자체에는 옳고 그름이 본래 없는 것이다.

10.
卽心無心。 是爲通達佛道。 卽物不起見。 名爲達道。
逢物直達知其本源。此人慧眼開。

마음에 입각하여 無心을 이루는 것을 佛道에 통달한다고 하고,
사물에 입각하여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스스로 어떤 견해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道에 통달한다고 한다.
바깥으로부터 다가오는 사물에 대하여,
그 사이에 어떠한 매개도 두지 않고 바로 그 이치에 이르러[直達]
그 本源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의 눈이 열려있는 것이다.

11.
智者任物不任己。 卽無取捨違順。
愚者任己不任物。 卽有取捨違順。
不見一物。 名爲見道。 不行一物。 名爲行道。

슬기로운 자는 바깥의 사물에 맡길 뿐,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기에 취하고 버림과 어기고 순응함이 없다.
이에 반해 어리석은 자는 자기를 앞에 세우고 사물에 맡기지 않으므로
거기에 취하고 버림과 어기고 순응함이 있다.
천지간에 무엇 하나 보지 않음을 道를 본다하고
천지간에 무엇하나 행하지 않음을 道를 행한다고 한다.

* 어떤 수좌가 동산 양개 선사에게 물었다.
「언제나 새의 길을 가라고 하시는데, 그 새의 길이란 어떤 것입니까?」
「아무도 만나지 않는 곳, 이것이 새의 길이다. 」
「어떤 식으로 가는 것입니까?」
「가는 실오라기 하나라도 몸에 걸치고 있으면 안 된다.」
「그것이 이른바 본래면목입니까?」
「뭐라고, 어째서 그렇게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는가?」
「뭐가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입니까? 」
「어떻게 되지 않았다면 왜 신분이 낮은 것을, 즉 하인을 주인으로 취급하는가?」
「그렇다면 본래면목은 어디에 있습니까?」
「허공에 나는 새는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러한 것마저 없는 사람,
그것이 바로 그것이다.」

12.
卽一切處無處。 卽作處無作法。 卽是見佛。
若見相時。 卽一切處見鬼。

어디에 있더라도 거기(여기라고 하는 그곳)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또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그 행위에 대하여 자각적 의식의 구속을 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부처의 봄[見]이다.
즉 진정한 실재를 움켜잡은 것이다.
여기에 반하여 相, 다시 말해 對象에 잘못 取着되면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도깨비를 만난다.
즉 실재 아닌 것을 실재로 보게되는 것이다.

13.
取相故墮地獄。 觀法故得解脫。
若見憶相分別。 卽受 湯爐炭等事。 現見生死相。
若見法界性。 卽涅槃性。 無憶想分別。 卽是法界性。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그 원인이 상(相:非實在)에 걸리기 때문이요,
해탈을 얻는 것은 법(法:實在)를 보기 때문이다.
실재를 기억하여 분별하는 것은 相을 취하는데서 생기기 때문에
이것을 보는 자는 지옥의 원인을 만든다.
즉, 태어나고 죽는다는 것이 현실 속에 진실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그로부터  湯지옥이나 爐炭지옥 등의 고통을 받는다.
여기에 반하여 법계의 본성을 사무쳐 보면
이것이 열반의 본성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법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相인가를 잊지 않는 분별[憶相分別],
즉 비실재를 기억하여 분별하는 일이 없는 것말고 다른 것이 아니다.

* 약산(藥山) 禪師가 좌선하고 있는데 한 수좌(首座)가 와서 물었다.
「오뚝하니 앉아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있네.」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생각한다고 하실 수 있습니까?」
「비사량(非思量).」

14.
心是非色故非有。 用而不廢故非無。
用而常空故非有。 空而常用故非無。

마음은 色界의 法, 즉 對象性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있음[有]이 아니지만,
그 작용이 쉬거나 폐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없음[無]이라고도 말할 수 없다.
작용이 있다해도 「이것이 바로 작용이다」 하여 파악할 것이 없는,
다시 말해 空이기 때문에 有라고도 말할 수 없다.
空은 空이지만 그 空 속에서 언제나 작용이 나오기 때문에
無라고도 말할 수 없다. 마음은 有無의 범주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卽說頌曰。
 心心心。難可尋。寬時遍法界。窄也不容針。
 亦不睹惡而生嫌。亦不觀善而勤措。
 亦不捨智而近愚。亦不抱迷而就悟。
 達大道兮過量。通佛心兮出度。不與凡聖同 。
 超然名之曰祖。

그 자리에서 게송을 읊으시니
"마음 마음 하는 그 마음 찾을 길 어려워라.
너그러울 땐 법계를 덮지만 좁아지면 바늘 끝도 용납치 않네."

安心法門 (終)
안심법문 마침

한문원본출처

http://www.cbeta.org/result/normal/T48/2009_001.htm

posted by 푸른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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