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論

Verses from the Centre

(The Philosophy of the Middle Way)
중도(中道)의 원리

Sanskrit: Mula madhyamaka karika.
Tibetan: dBu ma rtsa ba’i tshig le’ur byas pa shes rab ces bya ba.
by Nagarjuna
龍樹菩薩 造 梵志靑目 釋

Romanization and Literal English Translation
of the Tibetan Text
by
Stephen Batchelor
Sharpham College
April 2000

15. Investigation of Essences (Essence)
觀有無品
있음과 없음에 대한 고찰

1. It is unreasonable for an essence to arise from causes and conditions. Whatever essence arose from causes and conditions would be something that has been made.

衆緣中有性  是事則不然
性從衆緣出  卽名爲作法

因과 緣에서 自性이 발생한다면, 이는 타당하지 않다. 因과 緣에서 발생한 自性은 만들어진 것이 되기 때문이다.(MKV)
因緣에 의해 自性이 生起한다는 주장은 불합리하다. 만약 自性이 因緣으로부터 生起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만들어진 것[所作, krtaka]이 된다. (MS 15.1)

因이나 緣에 의해 自性이 생겨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다. 自性이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自性이라 말하는 것인데, 因과 緣에 의해 생겨난다면 그 自性은 만들어진 것이 되어 自性이 아니기 때문이다.

<해설>
다른 것에 의존하여 生起한다[pratitya bhavati]는 것과 緣起한다[pratitya-samutpada]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緣起이기 때문에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自性이 부정된다. 自性이란 지어진 것이 아닌 것[非所作]이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것(para)은 하나의 사물을 성립시키는 다양한 因과 緣을 가리킨다. 모든 사물은 자기가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하여 성립한다. 수레는 수레 아닌 것들이 화합하여 성립되고, 나는 나 아닌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수레는 自性이 없고 나 또한 그러하다. 이는 개념의 상대성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깨끗함이란 그 자체로 독립 자존적인 상태가 아니라 깨끗하지 못함에 상대적으로 의존하여 성립되는 상태이다. 이 때 깨끗함이란 개념 역시 無自性인 것이다.

2. How is it possible for there to be “an essence which has been made?”Essences are not contrived and not dependent on anything else.

性若是作者  云何有此義
性名爲無作  不待異法成

또, 만들어진 自性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自性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MKV)
어떻게 자성이 만들어진 것일 수 있겠는가. 자성은 지어진 것이 아니고[無作, akrtrima],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不待異法成, nirapeksa parata]이기 때문이다.(MS 15.2)

<해설>
空性성의 근거는 사물에 자성이 없다는 것이며, “무자성이므로 공하다.”[無自性故空]는 명제로 표명된다.『회정론』[22]에서도 같은 취지로 다음과 같이 설한다 : “제법을 조건으로 하여 존재하는 것을 공성이라고 한다. 또 조건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것은 무자성성이다.” 공사상을 표방하고 있는 <중론>의 대부분의 논지는 무자성설로 귀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공을 적극적으로 드러낼 때는 물론, 특정 입론을 논박할 때에도 언제나 무자성이라는 전제를 내세움으로써 논파하고 있는 것이다. 사물의 자성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물을 그 사물이게 하는 자기 동일성, 혹은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예컨대, 여기에 어떤 사람이 도자기를 빚고 있다고 한다면, 도자기를 빚는다는 현상은 행위자(agent)와 행위(action)와 행위의 대상(object)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요소[즉 衆緣]는 도자기를 빚는 현상이 성립할 때 비로소 그러한 모습[相]을 갖게 되는 것인데, 우리의 언어 구조와 사유 관습은 이 세 가지 현상에 독립된 실체성, 즉 자성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도자기 빚는 현상을 떠나서 도자기 빚는 사람과 도자기를 빚는 행위, 그리고 도자기라는 대상이 제각기 자기 동일성[自性]을 갖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3. If an essence does not exist, how can the thingness of the other exist? [For] the essence of the thingness of the other is said to be the thingness of the other.

法若無自性  云何有他性
自性於他性  亦名爲他性

自性이 없다면 어떻게 他性이 있을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他性의 自性을 他性이라 말하기 때문이다.(MKV)
自性이 없는데 어떻게 他性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입장을 바꾸면 他의 존재에 있어서의 自性이 곧 他姓이기 때문이다.

[There is a problem here with the Tibetan translation from Sanskrit. Svabhava is translated as rang bzhin, but parabhava rather clumsily as gzhan gyi dngos po [the term first appears in I:3]. A Tibetan reader would thus lose the etymological connection between “own-thing” (svabhava) and “other-thing” (parabhava), which then link up with “thing” (bhava) and no-thing (abhava). Nagarjuna is playing on the word “thing”.]


4. Apart from an essence and the thingness of the other, what things are there? If essences and thingnesses of others existed, things would be established.

離自性他性  何得更有法
若有自他性  諸法則得成

自性과 他性을 떠나서, 어떻게 존재자가 성립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自性이나 他性이 있을 때에만 존재자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MKV)
자성이나 타성이 실재할 때만 존재는 성립되기에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는 존재란 있을 수 있다.

5. If things were not established, non-things would not be established. [When] a thing becomes something else, people say that it is a non-thing.

有若不成者  無云何可成
因有有法故  有壞名爲無

만약 존재자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비존재자도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통 비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존재자의 변화이기 때문이다.(MKV)
존재가 성립되지 않으면 비존재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가 다른 상태로 바뀐 것을 비존재라 하기 때문이다.

Those who view essence, thingness of the other, things and non-things do not see the suchness in the teaching of the awakened.

若人見有無  見自性他性
如是則不見  佛法眞實義

자기 존재(自性)와 타자의 존재(他性), 그리고 존재와 비존재를 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담긴 진리를 보지 못한다.(MKV)
그러므로 자성과 타성, 존재와 비존재를 보는 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참뜻을 보는 자가 아니다.

7. Through knowing things and non-things, the Buddha negated both existence and non-existence in his Advice to Katyayana.

佛能滅有無  如化迦 延
經中之所說  離有亦離無

까띠야야나에게 한 설법에서, "존재한다"고 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고 하는 둘 모두가 존재와 비존재를 잘 구별해 알고 계신 세존에 의해 論破되었다.(MKV)
존재와 비존재를 바르게 아신 부처님께서는 마하 가전연(카타야나)에게 주신 가르침 속에서 있다 없다 하는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부정하셨다.

8. If [things] existed essentially, they would not come to non-existence.
It is never the case that an essence could become something else.

若法實有性  後則不應異
性若有異相  是事終不然

만약 존재가 본질적으로 존재한다면, 존재의 비존재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의 변화는 결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MKV)
만약 이것이 자성으로서 있다면, 그것이 없어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자성의 변화는 결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MS 15.8)

만일 自性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自性이란 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에, 그것이 非存在가 되어 없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9. If essences did not exist, what could become something else? Even if essences existed, what could become something else?

若法實有性  云何而可異
若法實無性  云何而可異

만약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변화가 존재하겠는가? 만약 본질이 존재한다면, 어떤 변화가 존재하겠는가?(MKV)
만일 自性이 없다면 무엇이 변하는 것일까? 만일 自性이 있다면 (자성은 변하는 것이 아닌데) 변화는 무엇이 변하는 것일까?

10. “Existence” is the grasping at permanence; “non-existence” is the view of annihilation. Therefore, the wise do not dwell, in existence or non-existence.

定有則著常  定無則著斷
是故有智者  不應著有無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영원(常住)에 대한 집착을 의미하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허무(斷滅)의 견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존재에도 비존재에도 의지하지 않는다.(MKV)
유(有)에 집착하면 상주론(常住論)에 떨어지고, 무(無)에 집착하면 단멸론(斷滅論)에 빠진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유(有)나 무(無)에 의지해서는 안된다.(MS 15.10)

자성이 있다고 하면 상주론에 빠지고 자성이 없다고 하면 단멸론에 빠진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자기의 견해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11. “Since that which exists by its essence is not non-existent,” is [the view of] permanence. “That which arose before is now non-existent,”leads to [the view of] annihilation.

若法有定性  非無則是常
先有而今無  是則爲斷滅

"실로, 自性으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고 하는 것은 영원(常住)이라는 잘못에, "전에는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허무(斷滅)라는 잘못에 떨어진다.(MKV)
[어째서 유무의 견해가 단상의 견해로 귀착하는가?] 자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소멸되지 않는다고 하면 상주론에 빠지고,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함으로써 단멸론에 떨어지기 때문이다.(MS 15.11)

만일 자성으로 있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상주론의 견해에 빠지고,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생각하면 단멸론의 견해에 빠진다.

<해설>
常住는 사물이 自性을 가지고 계속 존재한다는 연속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며, 斷滅은 자성을 가진 사물이 계속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연속성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어느 쪽이든 자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緣起的 관점에서 본다면 본래 생멸이 없기 때문이다. 열반 역시 단멸도 아니고 상주도 아니며,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고(苦)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苦를 자신이 짓는 것이라고 하면 짓는 자와 받는 자가 동일하므로 常見에 떨어지고, 他者가 짓는 것이라고 하면 짓는 자와 받는 자가 다르므로 短見에 떨어진다. 찬드라키르티의 해석에 따르면 ‘短은 斷絶로서 상속의 斷滅이라는 의미이며, 常은 常住로서 一切時에 있어서 堅固不變하다는 의미’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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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푸른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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