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論

Verses from the Centre

(The Philosophy of the Middle Way)
중도(中道)의 원리

Sanskrit: Mula madhyamaka karika.
Tibetan: dBu ma rtsa ba’i tshig le’ur byas pa shes rab ces bya ba.
by Nagarjuna
龍樹菩薩 造 梵志靑目 釋

Romanization and Literal English Translation
of the Tibetan Text
by
Stephen Batchelor
Sharpham College
April 2000

17.Investigation of Actions and Fruits (Acts)
觀業品
업과 그 과보에 대한 고찰

<주제해설>
이나다(Inada)는 당시 業의 自性說을 주장하는 소승학자들의 業과 果報에 대한 통속적인 입장이 19절까지이고, 19절 이후가 만물이 空하듯이 業 또한 空하며, 業이란 잠시 인연에 기대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自性說에 대한 대승론적인 입장에서의 반박이라고 하였지만 일부에서는 그릇된 견해는 6절에서 12절까지라고 주장한다.

1. If 1. Restraining oneself well and loving thoughts that benefit others are the Dharma which is the seed of fruits here and elsewhere.

人能降伏心  利益於衆生
是名爲慈善  二世果報種

자기를 다스리고 남을 이롭게 하는 자비심은 법에 맞는 행위이며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 좋은 果報를 받는 종자이다.(MS 17.1)

자기를 억제하고 타인을 이롭게 하며 자비심이 있는 것, 이것이 곧 法行이요, 來世와 今世에 있어서 果報를 받는 종자가 된다
자기를 다스리고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은 자비로운 法이다. 이는 현세에서도 후세에서도 果報를 낳는 씨앗이다.(MKV)

2. The great sage has taught all actions to be intention and what is intended. The specifics of those actions are well known to be of many kinds.

大聖說二業  思與從思生
是業別相中  種種分別說

위대한 성인께서는 思業과 思己業을 말씀 하셨다. 그 業에는 여러 가지 구별이 있다고 설하셨다. (MKV)
업은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思業]과 마음속에 생각해서 표면에 드러난 것[思已業]이 있으며, 업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고 최고의 선인에 의해 설해졌다.(MS17.2)
最高善(부처님)에 의하여 業은 의지(즉, 意業)와 의지의 뒤에 따르는 것(즉, 身業과 口業)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업에 대해서는 여러 종류의 구별이 있다고도 말씀하셨다.

3. In this respect action spoken of as “intention” is regarded as being that of mind. That spoken of as “what is intended” is regarded as being that of body and speech.

佛所說思者  所謂意業是
所從思生者  卽是身口業

그 가운데서 思라고 말씀하신 것은 意業으로 전해지고, 思己라고 말씀하신 것은 身과 口에 관한 것이다. (MKV)
그 가운데 마음 속에 생각하는 행위는 의(意)에 관한 것일 뿐이고, 마음 속에 생각에서 비롯하여 표면에 드러난 업은 신체의 행위[身業]와 말이다.[口業](MS 17.3)
그 중에서 意志로서의 업은 心的인 것이고, 意志의 뒤를 따르는 業은 신체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이다.

4. Whatever (1) speech and (2) movements and (3) “unconscious not-letting-go,” (4) other kinds of unconscious letting-go are also regarded like that.

身業及口業  作與無作業
如是四事中  亦善亦不善

말과 몸동작과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은 無表라 하는 것과 [번뇌가] 이미 끊어진 다른 여러 가지 無表라는 것이 전해진다.(MKV)
말과, 동작과, 욕망으로부터 아직 떠나 있지 않은 무표업(無表業: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업), 욕망으로부터 떠나 있는 무표업(無表業)과 (MS 17.4)
언어와 동작과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非遠難(악을 멀리하지 않는 것)와,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遠難(악을 멀리하는 것)와,

5. (5) Goodness that arises from enjoyment/use and in the same manner (6) what is not goodness,[and] (7) intention. These seven dharmas are clearly regarded as action.

從用生福德  罪生亦如是
及思爲七法  能了諸業相

좋은 果報를 누리는 일인 福과 나쁜 果報를 누리는 일인 복 아닌 것(非福)과 그리고 의지[思], 이 일곱 가지 法이 業을 나타낸다고 전해진다.
선한 과보를 받는 공덕, 나쁜 과보를 받는 악행, 마음 속으로 의도하는 것 등 일곱 가지가 있다.(MS 17.5)
福을 부르는 업과, 罪를 부르는 업 그리고 그 意志 이러한 일곱이 대체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業이라고 인정된다.

[This seven-fold division of acts is not traceable to any school of which I am aware. The simpler division into restraint and love found in v. 1 serves a similar purpose to v. 4&5 and has the added advantage of leading into v. 6 through its mention of “fruits”.]

6. If the action remained until the time of ripening, it would become permanent. If it stopped, by having stopped, how could a fruit be born?

業住至受報  是業卽爲常
若滅卽無業  云何生果報

만약 익고 있을 동안에도 業이 계속 남아 있다면, 그것은 영원으로 나아가는 셈이 되리라. 만약 소멸한다면, 소멸한 것이 어떻게 果報를 낳을 수 있겠는가?(MKV)
만일 행위[業]가 과보가 무르익을 때까지 존속해서 머문다면 그것은 상주(常住)가 된다. 만일 행위가 소멸해버린다면 어떻게 멸해버린 것이 果報를 생기게 할 수 있겠는가.(MS 17.6)
(만일 업이) 익을(熟) 때까지 머무른다면, 그 업은 常住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익을 때까지 머물지 않고) 없어진다면, 없어진 것이 어떻게 결과를 발생시키겠는가.

7. The continuum of sprouts and so on clearly emerges from seeds, and from that fruits. If there were no seeds, they too would not emerge.

如芽等相續  皆從種子生
從是而生果  離種無相續

(그릇된 견해는 이렇게 주장한다)
싹에서 시작되는 相續은 씨에서 나온다. 싹에서 열매가 나온다. 씨가 없다면 相續이 나오지 못한다.(MKV)
싹으로 시작하는 식물의 연속이 종자에서 나타나 그로부터 다시 과일이 생기는 것이라면 그 연속은 종자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MS 17.7)
싹으로부터 비롯되는 相續은 종자로부터 생겨나고, 그것으로부터 열매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차례로 이어받는 相續은 종자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8. Because continuums are from seedsand fruits emerge from continuums and seeds precede fruits, therefore, there is no annihilation and no permanence.

從種有相續  從相續有果
先種後有果  不斷亦不常

(그릇된 견해는 이렇게 주장한다)

씨에서 相續이, 相續에서 열매가 나오는 것이다. 씨가 앞서므로 해서 열매가 있기에 [씨와 열매는] 끊어진 것[斷滅]도 아니요, 이어진 것[常住]도 아니다. (MKV)
그리고 종자로부터 연속이 일어나며 또 연속으로부터 과일이 생긴다. 먼저 종자가 있고 이를 바탕으로 과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절도 아니고, 상주도 아니다.(MS 17.8)
종자로부터 차례로 이어받는 相續이 있게 되고, 그 相續에 의해 열매가 있게 된다. 종자가 있은 후에 열매가 있게 되지만 그 둘 사이의 관계는 단절도 아니고 상주도 아니다.

9. The continuum of mind clearly emerges from mind, and from that fruits. If there were no mind, they too would not emerge.

如是從初心  心法相續生
從是而有果  離心無相續

(그릇된 견해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므로, 마음의 相續은 마음에서 나오고, 거기서 결과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것[마음의 相續]은 마음 없이는 나오지 못한다.(MKV)
그 마음으로부터 마음의 연속이 나타나고, 그 연속에서 果報가 나타난다. 그 연속은 마음이 없이는 나타나지 않는다.(MS 17.9)
이와 같이 첫 마음으로부터 차례로 이어받는 마음의 相續이 생겨나고 여기에서 열매가 생겨난다. 그러므로 처음의 그 마음이 없으면 차례로 이어받는 마음의 상속은 생겨나지 않는다.

10. Because continuums are from minds and fruits emerge from continuums and actions precede fruits, therefore, there is no annihilation and no permanence.

從心有相續  從相續有果
先業後有果  不斷亦不常

(그릇된 견해는 이렇게 주장한다)
마음에서 相續이, 相續에서 결과가 일어난다. 業이 앞서므로 해서 果報가 있기에, [業과 果報는] 斷滅도 아니요, 常住도 아니다.(MKV)
그리고 마음으로부터 연속이 생기고, 그 연속으로부터 果報가 생긴다. 먼저 행위가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果報가 생기므로 단절도 상주도 아니다.(MS 17.10)
마음으로부터 相續이 있게 되고, 이러한 相續으로부터 果報가 생겨난다. 업이 먼저 있고 뒤에 果報가 따르므로, 단절도 아니고 常住도 아니다.

11. The ten paths of white action are the means of practising Dharma. Here and elsewhere, the fruits of Dharma are the five kinds of sensual qualities.

能成福德者  是十白業道
二世五欲樂  卽是白業報

(그릇된 견해는 이렇게 주장한다)
열 가지 깨끗한 業의 길(十善惡道)은 善法을 달성하는 수단이다. 다섯 가지 欲樂은 현세와 후세에서 받는 善業의 果報이다.(MKV)
열 가지 善業의 길(白業道 : 不殺, 不盜, 不邪淫, 不妄語, 不兩舌, 不惡口, 不無益語, 不 , 不邪見)은 正法을 성취시키는 방편이다. 그 선업은 來世와 今世에 있어서 다섯 가지 감각적 즐거운 성품의 果報이다.

12. If it were as that investigation, many great mistakes would occur. Therefore, that investigation is not valid here.

若如汝分別  其過則甚多
是故汝所說  於義則不然

만약 이런 分別이 존재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큰 잘못이 있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런 分別은 결코 여기에서 성립되지 않는다.(MKV)
만일 이와 같이 분별하여 생각한다면, 크고 많은 잘못을 저지를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분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해설> 나가르주나는 개념화[分別]하는 이런 [7-11까지 앞서 말한 分別이나 설명] 일은 많은 실체적인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타당하지 않다고 반박해 나간다.

13. I will fully declare the investigation which is taught by the Buddhas, Pratyekabuddhas and Sravakas, which is valid here.

今當復更說  順業果報義
諸佛 支佛  賢聖所稱歎

나아가, 나는 그에 대해 이치에 합당하며 모든 부처들과 벽지불들과 성문들이 칭송한 分別[思惟]을 설명하겠다.(MKV)
나는 여러 부처님들과 여러 獨覺과 聲聞에 의해 찬탄된 것을, 여기에 온전히 잘 맞는 분별로 말하리라

[The explicit denunciation of v. 12 and the strident certainty of v. 13 are an uncharacteristically heavy-handed and wordy way of telling us that the “right” view is about to be given. Yet the text presents all voices with sympathy, suggesting a developmental account of ethics in Buddhism rather than a “we’re right - you’re wrong” version.]


14. Just like a contract, irrevocable action is like a debt. In terms of realms, there are four types. Moreover, its nature is unspecified.

不失法如券  業如負財物
此性則無記  分別有四種

不失法이 약속어음이라면, 業은 빚과 같은 것이다. 그것[不失法]은 界로 보면 네 가지이고, 세가지 성품[三性]으로 보면 三性 중 無記性이다.(MKV)
마치 계약처럼, 돌이킬 수 없는 행위는 빚과 같다. 실제라고 말할 수 있는 界로는 네 종류의 세계(欲界, 色界, 無色界, 無漏界)가 있고 그 본성은 無記(善, 不善, 無記 셋 중의 無記)이다.(MS 17.14)
不失法(不滅法 : 覺)은 債券과 같고 業은 빚[負債]와 같다. 그것의 界로서는 네 종류이고, 그것의 본성은 無記이다.

<해설> 여기서 나가르주나는 業과 果報를 약속어음과 빚의 관계로 비유함으로써 業이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단지 되찾을 때까지만 존속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사람은 약속어음이 보존되어 있는 한, 그리고 채무를 지불하지 않는 한, 결국 시간과 因緣에 의지하여 그 果報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약속어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설령 약속어음이 없어진다 해도 한쪽에서는 그런 계약을 이행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할 수도 있다.

15. It is not let go of by letting go, but only let go of by cultivation. Therefore through irrevocability are the fruits of acts produced.

見諦所不斷  但思惟所斷
以是不失法  諸業有果報

[見道의] 끊음에 의해 끊어지지 않고 오직 修道에서 끊어진다. 그러므로 不失法에 의해 갖가지 業의 果報가 생겨나는 것이다.(MKV)
不失法[不滅法]은 마음을 놓음(진리[諦]를 봄)으로서는 끊을 수 없고, 오직 마음을 경작(修道)함으로써만 끊을 수 있다. 이런 돌이킬 수 없는 것에서 여러 업의 果報가 생긴다.(MS 17.15)
이것은 見道의 斷으로서는 끊을 수 없고 修道로서만 끊을 수 있다. 그러므로 不失法으로 말미암아 여러 業들에 果報가 생기는 것이다.

16. If it perished through being let go of by letting go and the transcendence of the action, then faults would follow such as the perishing of actions.

若見諦所斷  而業至相似
則得破業等  如是之過咎

만약 [不失法이 見道의] 끊음에 의해, 또는 業의 변형에 의해 끊어지는 것이라면, 業을 파괴하는 잘못에 떨어지고 말리라.(MKV)
만일 不失法이 마음을 놓음(진리[諦]를 봄)으로서 끊어지거나, 업의 顯現으로 끊어진다면 여기에는 業의 파괴 등의 잘못이 뒤따른다.(MS 17.16)
만일 不失法이 見道의 斷으로 끊어지거나, 또는 업의 顯現으로 끊어진다면 여기에는 業의 파괴 등의 잘못이 뒤따른다.

17. The very [irrevocability] of all actions in similar or dissimilar realms, that one alone is born when crossing the boundary [i.e. reborn].

一切諸行業  相似不相似
一界初受身  爾時報獨生

同類이든 非同類이든 간에, 동일한 界의 모든 業들은 생을 의탁[託生]할 때에, 오직 한 가지만이 생겨난다.(MKV)
界를 같이 하는 모든 相似(同類), 不相似(不同類)인 業이 결합할 때 하나의 不失法 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은 業이 익었을 때도 존재한다.(MS 17.17)
界를 같이 하는 모든 相似(同類), 不相似(不同類)인 業이 결합할 때에 하나의 不失法이 생겨난다

<해설> 나가르주나는 業은 두 생명을 이어주는 구실로 본다. 붓다는 이렇게 선언했다. 존재들은 그들 자신의 業, 고유하게 내려오는 業, 근원으로서의 業, 핏줄의 業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의 열등함과 우등함을 구분하는 것도 바로 이 業인 것이다.

18. In the visible world there are two kinds. Actions of all [types] and that [irrevocability] of actions are produced as different things and remain [so?] even on ripening.

如是二種業  現世受果報
或言受報已  而業猶故在

[同類와 非同類, 善과 惡 따위의] 두 가지 모든 業에 상응해서, 그것[不失法]은 現生에 발생한다. 그리고 [果報가] 익었을 때도 그대로 머물러 있다. (MKV)
두 종류의 모든 業에, 저 不失法(不滅法)이, 業이 현존할 때에, 그 하나하나에 대하여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은 業이 익었을 때도 존재한다. (MS 17.18)
모두 두 종류의 業에, 저 不失法이, 業이 현존할 때에, 그 하나하나에 대하여 생겨난다.

19. When the fruit is transcendent and when one dies, that ceases. One should know its divisions to be without-corruption and with-corruption.

若度果已滅  若死已而滅
於是中分別  有漏及無漏

그것(不失法)은 果報를 끊음으로써 소멸하거나 죽음으로써 소멸한다. 거기서 有漏와 無漏의 구별이 나타날 것이다.(MKV)
그것은 두 가지 모든 業 하나 하나에 상응해서, 現生에 발생한다. 그리고 果報가 익었을 때도 머물러 있다.
不失法(不滅法)은 果를 주고 나서, 혹은 죽은 다음에 없어진다. 이 不失法(不滅法)에서 無漏(타락하지 않음)와 流漏(타락함)는 구분되어야 한다.
이렇듯 두 가지 業은 現世에 果報를 받는다. 또한 果報를 받고 나서도 業은 여전히 머물러 있다.

20. Emptiness is not annihilation and samsara is not permanent. The dharma of the irrevocability of actions is taught by the Buddha.

雖空亦不斷  雖有亦不常
業果報不失  是名佛所說

空性은 斷滅이 아니며, 輪廻는 常住가 아니다. 이와 함께 業의 不失法을 부처님께서는 說示하셨다. (MKV)
비록 空하지만 단절이 아니며, 있어 流轉하지만 常住가 아닌 業의 不失[不滅性]은 부처님에 의해 말씀된 것이다.

<해설> 나가르주나에 따르면 부실법(avipranasa-karma)은 단지 업에 의해 조건지워진 윤회의 연속성을 의미하며, 이 業 가운데 일부는 결실을 맺거나 죽음으로써 도중에 사라져버리는 반면에, 거미줄 같이 끈끈한 일부 業들은 미래의 윤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輪廻의 전 과정은 緣起이며, 그것은 모든 요인이 만나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1. Because actions are not born, in this way they have no nature. Therefore, because they are not born, therefore they are irrevocable.

諸業本不生  以無定性故
諸業亦不滅  以其不生故

왜 業은 발생하지 않는 것일까? 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발생하지 않기에 소멸하지도 않는다.(MKV)
왜 業은 생기지 않는가. 그것은 자성을 지니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생겨난 것이 아니므로 소멸하는 일도 없다.(MS 17.21)
어찌하여 업은 본래 생겨남이 없다 하는가. 그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겨남이 없기에 없어지지도 않는다.

22. If actions existed [by] nature, without doubt they would be permanent. Actions would not be done [by an agent] because what is permanent cannot be done.

若業有性者  是則名爲常
不作亦名業  常則不可作

만약 業이 자성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常住할 것이다. 또 業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상주하는 것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MKV)
만일 업이 자성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상주가 될 것이다. 또 업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게 된다. 왜냐 하면 상주인 것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MS 17.22)
만약 업이 자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상주일 것이며, 또 지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상주인 것은 作爲되지 않기 때문이다.(MS 17.22)
만일 業에 自性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常住할 것이다. 그리고 만들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常住하는 것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설>
만일 業에 自性이 있다면 그 업은 常住할 것이며, 따라서 그 常住하는 業에 의해 果報가 생겨난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은 항상 業의 果報를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부당하다.

23. If actions were not done [by anyone], one would fear meeting what [one] has not done. Also the fault would follow for that [person] of not dwelling in the pure life.

若有不作業  不作而有罪
不斷於梵行  而有不淨過

만약 業이 수행되지[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라면, 수행되지 않았는데도 果報를 받는다는 두려움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非梵行(청정하지 못한 행)과 오류가 일어나리라.(MKV)
만일 業이 그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떤 이는 그것을 짓지도 않았는데 그것을 받아야하는 두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은 순수한 삶(梵行 : 음욕을 끊은 맑고 깨끗한 행실, 중도의 입장에서 맑고 깨끗한 자비심으로 중생을 제도하는 일)에 머물지 못한다는 잘못이 따르게 될 것이다.

24. All conventions also without doubt would be contradictory. Also the distinction between doing good and evil would not be valid.

是則破一切  世間語言法
作罪及作福  亦無有差別

(그렇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世間의 언어 관습들과 어긋나리라. 그리고 福德을 행하는 사람과 罪惡을 행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도 의미가 없게 되리라.(MKV)
이것은 의심할 바도 없이 세속의 모든 관습과 모순될 것이다. 그리고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역시 구별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25. [When] the ripening of that [action] has ripened it would ripen again and again, because if it existed [by] nature, it would [always] remain.

若言業決定  而自有性者
受於果報已  而應更復受

만약 業이 결정되어 있어서 自性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이미 익은 것(果報)이 또 익는 셈이 되리라.(MKV)
만일 業이 이미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自性이 있다고 한다면, 이미 받은 果報도 또 다시 당연히 받아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26. This action has the character of affliction and afflictions are not real. If affliction is not real, how can action be real?

若諸世間業  從於煩惱生
是煩惱非實  業當何有實

이 業은 번뇌의 성질을 갖고 있다. 그런 번뇌들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 그런 번뇌들이 진실한 것이 아닐진대, 어떻게 業이 진실하게 존재하겠는가?(MKV)
이 세상의 업이 번뇌로 인해 생긴다해도, 그러한 번뇌는 실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 업이 실재일 수 있단 말인가.(MS 17.26)
그런데 이 業은 번뇌를 본성으로 하고 있다. 그러고 여러 번뇌는 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번뇌가 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業을 어떻게 진실로 존재할 것인가.

27. Actions and afflictions are taught to be the conditions for bodies. If actions and afflictions are empty, how can one speak of bodies?

諸煩惱及業  是說身因緣
煩惱諸業空  何況於諸身

업과 번뇌들은 여러 신체들의 緣이라고 설해지고 있다. 그런데 만약 업과 번뇌들이 空하다면, 여러 신체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잇겠는가?(MKV)
업과 번뇌에 의존하여 신체가 생겨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만일 업과 번뇌가 空하다면 신체에 관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MS 17.27)
사람들은 업과 번뇌가 緣이 되어 몸이 생긴다고 하지만, 업과 번뇌가 空하다면 몸에 대해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28. People who are obscured by ignorance, those with craving, are the consumers [of the fruits of action]. They are not other than those who do the action and they are also not those very ones.

無明之所蔽  愛結之所縛
而於本作者  不卽亦不異

生命은 無明에 덮여있고 渴愛에 묶여 있다. 그는 [果報를] 받는다. 그는 業을 짓는 자와 다르지도 같지도 않다. (MKV)
無明에 가리워진 衆生은 갈애(渴愛)에 결박되어 있고, 그가 業報를 받는 사람이다. 이렇게 業報를 받는 자는 業을 지은 자(作者)와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MS 17.28)
無明에 가리워진 衆生은 또한 渴愛에 의하여 결박되어 있다. 그는 果報를 받는 사람이다. 그러한 그[受報者]는 (業의) 作者와 다르지 않고, 또한 作者와 같지도 않다.

29. Because the action does not emerge from conditions and does not emerge from non-conditions, therefore, the agent too does not exist.

業不從緣生  不從非緣生
是故則無有  能起於業者

이 業은 緣起하는 것도 아니고 緣起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에, 業을 짓는 이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MKV)
이 業은 조건[緣]에 의해 생겨난 것도 아니고, 조건이 아닌 것[非緣]에 의해 생겨난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은이(作者) 또한 있는 것도 아니다.(MS 17.29)
이 業은 緣으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또 非緣으로 생겨난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자도 또한 있는 것이 아니다.

30. If neither the action nor the agent exists, where can there be a fruit of the action? If the fruit does not exist, where can the consumer exist?

無業無作者  何有業生果
若其無有果  何有受果者

만약 業도 業을 짓는 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業에서 생겨난 결과나 과보가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또한 果報가 존재하지 않거늘, [果報를] 받는 사람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MKV)
만일 業도 없고 지은이도 없다면 業으로부터 생기는 果報는 또 어디에 있을 것인가. 또한 果報가 있지 않다면 어디에 그것을 받는 자(受報者)가 있을 것인가.(MS17.30)
만일 업도 없고 작자도 없다면, 업으로부터 생겨나는 과보는 어디 있을 것인가? 또한 果報가 있지 않는데 어디에 그것을 받는 자(受報者)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31. Just as a teacher creates a creation by a wealth of magical powers, and just as if that creation too created, again another would be created,

如世尊神通  所作變化人
如是變化人  復變作化人

마치 신통력을 갖추신 선생님(世尊)께서 허깨비(化人)를 만들어 내고 그 허깨비가 다시 다른 허깨비를 만들어 내듯이.(MKV)
마치 부처님께서 神通力으로 요술로 사람을 만들어 내고, 그렇게 만들어져 나온 사람이 또 다시 다른 사람을 요술로 만들어내듯이(MS 17.31)
마치 神通이 具足된 敎主가 變化人을 化作해 내고, 이러한 變化人이 또다시 다른 幻人을 만들어 내듯이.

32. Like this, whatever action too done by that agent [is ]also like the aspect of a creation. It is just like, for example, a creation creating another creation.

如初變化人  是名爲作者
變化人所作  是則名爲業

그렇듯이 業을 짓는 사람은 허깨비 모습을 하고 있다. 業은 만들어진 것이다. 마치 다른 허깨비가 그 허깨비에 의해 만들어지듯이. (MKV)
이렇게 처음부터 요술로 만들어진 사람이 業을 짓는 자인 작자라 이름하는 것이므로, 그 요술로 만들어진 사람이 지은 業이란 그 요술로 만들어진 사람이 만들어 낸 다른 사람과 같은 것이다.(MS 17.32)
이와 같이 作者란 化作된 모습으로 있는 것이며, 그에 의하여 만들어진 어떠한 業도, 變化人에 의하여 化作된 다른 幻人과 같은 것이다.

<해설> 부처님께서는 沙門果經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의 마음은 이토록 평온하며 순수하며 투명하며 순화되어 악이 없으며 부드럽고 섬세하고 확고하고 흔들리지 않아, 그는 마음을 그러한 인식과 통찰에 기울인 결과,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 '나의 이 몸은 色을 갖고 있으며 四大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나온 것이며 밥과 마실 것으로 늘 새롭게 변하고 있다. 無常性이 내 몸의 본성이라 결국 그것은 썩고 마멸되며 녹아버리고 쪼개져 없어지고 만다. 이 나의 의식도 또한 그것에 놓여있고 매여있어 그것에 따라 움직인다.' "

33. Afflictions, actions and bodies and agents and fruits are like a city of gandharvas, a mirage, a dream.

諸煩惱及業  作者及果報
皆如幻與夢  如炎亦如嚮

煩惱와 業과 신체 그리고 者을 짓는 이와 果報, 이 모든 것들은 간다르바 城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신기루 같으며 꿈과 같은 것이다.(MKV)
그러므로 모든 煩惱와 業과 몸과 지은이(作者)와 果報는 신기루와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꿈과 같은 것이다.(MS 17.33)
煩惱와 業과 身體 그리고 作者와 果報는, 간다르바 城(蜃氣樓)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아지랑이와 같고 꿈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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