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論

Verses from the Centre

(The Philosophy of the Middle Way)
중도(中道)의 원리

Sanskrit: Mula madhyamaka karika.
Tibetan: dBu ma rtsa ba’i tshig le’ur byas pa shes rab ces bya ba.
by Nagarjuna
龍樹菩薩 造 梵志靑目 釋

Romanization and Literal English Translation
of the Tibetan Text
by
Stephen Batchelor
Sharpham College
April 2000

16. Investigation of Bondage and Freedom (Life)
觀縛解品
속박과 해탈에 대한 고찰

<주제해설>
이 장에서는 輪廻의 주체를 고찰한다. 여기서 諸行이란 五陰 혹은 몸(肉身)을 가리키며, 今世에 있어서 五陰이 죽어 없어지면 來世에서의 五陰이 생겨나는데 이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輪廻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의 오음(此陰)과 저 세상에서의 오음(彼陰)과의 인과적 동일성을 주체적인 관점에서 본 것을 衆生이라 부른다. 그리고 여기서는 이러한 衆生이 윤회의 주체가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衆生은 본래 자성이 없으므로 常住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今世와 來世에 걸쳐 있으므로 斷滅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個人我에 대한 영혼(衆生)의 常住論과 斷滅論이 모두 부정된다. 여기서는 이와 같이 斷滅도 常住도 아닌 윤회를 無我輪廻라고 한다.

1. If it is said that impulses are “samsara”, if they were permanent, they would not move around. Even if impermanent, they would not move around. Sentient beings too are similar in this respect.

諸行往來者  常不應往來
無常亦不應  衆生亦復然

만약 行들이 윤회한다면, 그것들은 영원한 것(常住)으로 윤회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일시적인 것(無常)으로 윤회하는 것도 아니다. 중생도 이와 마찬가지다.(MKV)
제행(諸行, samskara)의 윤회(輪廻, samsara)는 상(常)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無常)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중생(衆生, sattva)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MS 16.1)

2. If it is said that persons “move around,” if they are non-existent when searched for in five aspects among the aggregates, sense fields and elements, what would move around?

若衆生往來  陰界諸入中
五種求盡無  誰有往來者

만약 사람이 윤회한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蘊, 處, 界 등에서 다섯 측면으로 찾아보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가 윤회하겠는가?(MKV)
만일 개인아[衆生, pudgala]가 윤회한다면,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 속에서 구해 보아도 그런 것[個人我]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무엇이 윤회한다는 말인가. (MS 16.2)


3. If one moves around in having clung [to something] and then clinging [to something else], there would be no becoming. If there were no clinging and no becoming, who would move around?

若從身至身  往來卽無身
若其無有身  則無有往來

한 取着에서 다른 한 取着으로 윤회한다면, 非生이 있게 되리라. 非生인, 그래서 取着이 아닌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어떻게 윤회한단 말인가?(MKV)
만약 몸[身]에서 몸으로 윤회해간다면 그렇게 윤회(來往)하려면 몸이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 몸이 없다면 윤회하는 존재도 없을 것이다.(MS 16.3)

<해설>
五蘊[혹은 十二處, 十八界]은 개인아와 서로 의존하고 있다. 五蘊도 자성이 없고 개인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개인아의 윤회 전생(輪廻轉生)도 현생의 五蘊과 내생의 五蘊이 서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4. It is in no way feasible that impulses go beyond misery. And it is in no way feasible that living beings go beyond misery.

諸行若滅者  是事終不然
衆生若滅者  是事亦不然

行의 소멸은 어떻게 해도 성립되지 않는다. 衆生의 소멸도 또한 어떻게 해도 성립하지 않는다. (MKV)
모든 형성된 것[諸行, samskara]은 열반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중생(衆生, sattva)이 열반에 들어가는 일도 있을 수 없다.(MS 16.4)

5. Impulses that have the properties of being born and dying are not bound and will not be freed. In the same way as above living beings too are not bound and will not be freed.

諸行生滅相  不縛亦不解
衆生如先說  不縛亦不解

발생과 소멸의 相을 갖춘 行은 束縛되지도 解脫하지도 않는다. 중생도, 앞에서처럼, 속박되지도 해탈하지도 않는다.(MKV)
모든 형성된 것은 生滅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 중생 역시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MS 16.5)

6. If clinging binds, the one who has clinging would not be bound. And there would be no bondage without clinging. In what situation would there be bondage?

若身名爲縛  有身則不縛
無身亦不縛  於何而有縛

만일 取着이 곧 속박이라면, 取着을 갖는 사람은 속박되지 않을 것이며, 取着이 없는 사람도 속박되지 않을 것이다. 그럴진대,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이 속박되겠는가?(MKV)
만일 五蘊에의 집착이 속박하는 것이라면, 五蘊을 지니는 주체는 속박되지 않는다. 五蘊을 취하지 않는 자도 속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상태에 있는 자가 속박될 것인가.(MS 16.6)

7. If binding existed prior to one who is bound, [that unbound person] would depend on binding. That too cannot be. The rest has been explained by the gone, the not-gone and the going.

若可縛先縛  則應縛可縛
而先實無縛  餘如去來答

만약 속박이 속박될 것의 속박보다 앞서서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머지 것은 지금 운동하고 있는 것, 이미 운동한 것, 아직 운동하지 않은 것에 의해 이미 설명한 바 있다.(MKV)
만일 속박되는 자 이전에 속박이 있다면 속박은 뜻대로 속박할 것이다. 그런데 그럴 수는 없다. 다른 것에 대해서도 현재 가고 있는 것, 이미 간 것, 아직 가지 않은 것[의 고찰]에 의해 설명되었다.(MS 16.7)

8. Those who are bound will not be free. And those who are not bound will not be free. If those who are bound become free, bondage and freedom would be simultaneous.

縛者無有解  無縛亦無解
縛時有解者  縛解則一時

이미 속박된 사람은 해탈하지 않으며, 아직 속박되지 않은 사람도 해탈하지 않는다. 이미 속박된 사람이 지금 해탈하고 있다면, 속박과 해탈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셈이다.(MKV)
이미 속박된 자는 해탈하는 일이 없다. 속박되지 않은 자도 해탈하는 일은 없다. 만일 속박된 자가 현재 해탈하고 있는 자라면 속박과 해탈은 동시가 된다.(MS 16.8)

<해설>
7절에서 가리키는 것은 제2장 관거래품(觀去來品)의 논법이다. 그것을 원용하면 다음과 같다 : 과거에 속박된 자는 이미 지나갔으므로 해탈할 수 없고, 미래에 속박될 자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해탈할 수 없다. 만약 현재 속박된 자가 풀려난다면 그것은 속박과 해탈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인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7절과 8절의 의미이다.

9. “I, without clinging, am beyond misery. Nirvana is mine.” Those who grasp in that way have great grasping and clinging.

若不受諸法  我當得涅槃
若人如是者  還爲受所縛

"取着이 없는 사람이 열반에 드는 것이니, 열반은 내것이 되리라"고 집착하는 사람은 取着에 크게 집착하는 것이다. (MKV)
나는 [五蘊에 대한] 집착이 없는 자가 되어 열반에 들어갈 것이다. 나는 열반을 성취할 것이다.”라는 邪見을 가진 사람에게는 도리어 그러한 執着이 큰 邪見이 된다.(MS 16.9)

<해설>
五陰을 끊고서 열반에 들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自我와 五陰이 다르면서도 하나(異而一)인 관계에 있음을 보지 못하고, 오음의 다른 측면만 보는 執着을 가진 사람이다.

10. When nirvana is not born and samsara not eliminated, then what is samsara? And what is considered as nirvana?

不離於生死  而別有涅槃
實相義如是  云何有分別

열반을 增益하지도 않고 윤회를 損減하지도 않을 때, 윤회다 열반이다 어떻게 分別할 수 있겠는가?(MKV)
열반을 내세우지도 않고 열반을 버리지도 않는 그 곳(궁극적인 진리의 영역)에 어떤 윤회, 그 어떤 열반이 따로 있겠는가?(MS 16.10)

<해설>
涅槃과 輪廻 역시 상호 의존적으로 성립하므로 空한 것이다. 輪廻를 실체화해서 거기에 얽매이는 것이 衆生이요, 그것의 空性을 깨쳐서 구속되지 않는 것이 부처이다. 그러니 열반조차도 실체시해서 그것에 執着한다면 결코 涅槃을 證得할 수 없는 것이다. 因果는 異而一이니, 異는 生死이고 一은 열반이다. 그러므로 生死가 곧 그대로 涅槃이다. 이 구절에서 모든 대승경전의 기본 원리인 "중생이 있는 그대로 곧 부처"이며 "윤회가 곧 열반"이라는 구절외에 "평상심이 부처", "날마다 좋은 날" 등등의 禪家의 용어들이 파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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