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祖直指心體要節

과거칠불(過去七佛)

1.

비바시불(毘婆尸佛)은 정관(淨觀)이니

이것은 정신수양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고요히 관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무엇이 좋으니 무엇이 좋으니 해도 정관하는 것이 최고의 공부 길이다.

증도가(證道歌)에

오음부운공거래(五陰浮雲空去來)하고 삼독수포허출몰(三毒水泡虛出沒)이라.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으로 구성된 심신은

뜬구름 같아서 공연히 왔다갔다하며 삼독 오욕의 번뇌는 물거품 같아서

헛되이 나왔다 없어졌다 하는 것이니 환인 심식이 어디 있겠는가.
죄복도 이와 같아서 본래 없는 것, 본래 없는 그 자리에는 주한 다는 그것도 없으니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선악을 초월한 자리를 지선(至善)이라 이르고

고락을 초월한 자리를 극락이라 말씀하셨다.

소응단이단(所應斷已斷),
끊을 바가 없는 것을 끊는다. 본래 끊을 것도 이를 것도 없지마는 끊는다.
이것이 작업취사 자리다.

편일체자재불(遍一切自在佛)
끊을 것도 없지만 끊는 것 편일체 자재불이라.

어디에 걸릴 것도 막힐 것도 없는 자재한 부처의 경지에 가는 것이 최고의 경지다.

상대 개념을 초월한 절대 자리로 그 자리를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로다" 하시었다.

정관, 최상, 소응단이단.
청정법신불 자리를 깨닫는 것이 최상이고

그 자리와 같이 수양하는 것이 정관이고

그 자리와 같이 행하는 것이 소응단이단이다.

끊을 것도 없지만 끊는 것이 편일체 자재불이다.

2.

선법도 환이요 악업도 환이니

몸은 물거품이 모인 것과 같아 인연 따라 모였다 인연 따라 흩어지고

마음은 바람 같아 없는 것 같으나 왔다갔다하는 것이니

환출은 뿌리가 없고 실 다운 성품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에도 얽매이지 말고 악에도 얽매이지 말고

복에도 얽매이지 말고 죄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된다.

古佛未生前에 凝然一相圓이라
釋迦猶未會거든 迦葉豈能傳가

3.

몸은 인연의 소집이요 무상한 것이고,

마음은 본래 무생(無生)한 것이나 경계를 따라 있어 지나니

전경이 없을 것 같으면 마음도 또한 없을 것이다.

죄복도 환(幻) 같아서 일어나고 또한 멸하는 것이다.
죄를 짓고 참회하여 복을 짓고,

복을 짓고 자만하여 죄를 짓고 하기 때문에 둘을 다 떠나야 한다.

지을 때에 부모의 마음과 스승의 마음으로 고쳐야 한다.

그 죄를 고치고 난 뒤에는 본래대로 돌아가야 한다.

선을 좀 지었다고 해서 잘못한 것도 좋게 보고,

악을 지었다고 해서 잘한 것도 밉게 보아서는 안된다.

죄를 지은 그 순간 환출이고 복을 지은 그 순간도 환출이다.

금강경의 골자가 응무소주이생기심이다.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덕(全德)은 독존(獨尊)이요, 독생자(獨生子)이니

깨달으면 다 독존이요, 독생자요, 독로(獨露)인 것이다.
과거심(過去心)도 불가득(不可得)이요, 현재심(現在心)도 불가득이요,

미래심도 불가득이니 삼심불가득(三心不可得)이

금강을 성리로 뭉쳐서 해석한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둘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4.

몸이 실 없음을 볼 것 같으면 이것이 참 불신(佛身)이요 색신여래 (色身如來)라.

마음이 허깨비 같음을 요달하면 이것이 법신여래(法身如來)를 증득함이니

심신이 본래 공(空)함을 인득(認得)할 것 같으면

부처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 파수공행한다는 말이다.

有碍中無碍 (유애중무애)요
無碍中有碍 (무애중유애)로다
無碍無不碍 (무애무불애)면
是卽眞無碍 (시즉진무애)니라

유애중무애(有碍中無碍)니

일체자재(一切自在)해서 무애해탈(無碍解脫)하는데,

세상사에는 애착 탐착이 있는 것이다.

좋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는 것이 현실인데 그 가운데 걸림이 없어야 한다.
무애중유애(無碍中有碍)라.

설사 걸림이 없다 할지라도 걸림 없는 가운데

반드시 종통을 댄다든지 진리를 댄다든지 해서

걸림 없는 가운데 대의와 법도가 있어야 한다.

그냥 무애로만 나갈 것 같으면 큰 도인이 못된다.
무애무불애(無碍無不碍)라.

걸릴 것도 없어야 되지만 또한 걸리지 않을 것도 없어야 하나니

이러한 즉 시즉진무애(是卽眞無碍)라. 이것이 참으로 여래 자재한 것이다.

도가에서 무애 자재한다고 음주와 계문을 자행자지하여

무애로 떨어지면 나중에 악도로 떨어진다.

걸림이 없는 자리도 보고 걸림이 없는 가운데 능히 걸림이 있어

수행하는데 걸림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여의 자재한 여래의 문에 들 수 있는 것이다.

자재한 경지를 얻었다 할지라도 끊을 것은 끊을 줄 알아야 한다.

5.

삽삼조사 게송을 많이 보고 새기면 뜻이 전부 통해진다.

살아가는 가운데 저 사람은 죄지은사람하면 그것이 착이요,

선을 지었다고 "나는 선한 사람" 하면 벌써 죄의 싹이 솟는 것이다.

참회하여 한 생각 거두면 그 찰나에 죄도 없어지는 것이다.

한 생각 상이 나면 바로 죄가 되는 것이다.

6.

일체 중생의 성품이 청정하니 근원 자리에서 보고

불성 자리에서 볼 것 같으면 청정하지 않음이 어디 있으며

오히려 청정하다 하는 말도 어그러짐이라

그 자리에 무엇이 생하고 멸함이 있으리요.

이 몸은 사대(四大)의 소집(所集)이라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어지는 이합집산(離合集散)이요 환생(幻生)이니

거기에 죄복이 어디 있으며 선악인들 어디 있겠는가?

중생이 환화(幻化)의 놀음에 근본을 잃으니

생사와 죄복과 선악의 굴레에서 벗어날 날이 그 언젠가?

불생이라 불멸하고 불멸이라 불생이라 한 말이 불교의 최고 진리다.

그것을 단군께서는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로 말씀하셨다.

生來 (생래)에 生不生 (생불생)이요
死去 (사거)에 死不死 (사불사)로다
不生 (불생)이라 不滅 (불멸)하고
不滅 (불멸)이라 不生 (불생)이로다

7.

육진(六塵)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육경(六境)을 의미한다.

육근(六根)은

안근(眼根), 이근(耳根), 비근(鼻根), 설근(舌根), 신근(身根), 의근(意根)의

육관(六官)을 의미한다.

육식(六識)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의식(意識)을 의미한다.

본래에 한 법이라고 이름지을 것도 없지마는

하열한 근기를 위해 한 법을 일렀으나

그 한 법도 참 법은 아니니 이 게송의 참뜻을 깨치면

천만 경전을 다 볼 것이 없으리라

도가에서 무엇을 받았니 받았니 해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하고

구전심수(口傳心授)로 말로 마음으로 받아 다시 전함이다.

그래서 정법 천년은 구전심수가 되고

상법 시대는 글과 경전에 의지하고 계법 시대는 형식과 의식에 의지한다.

조사 게송(祖師 偈頌)

1.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정처(入定處) 자리를 말함이니

그 자리는 법이다 아니다 할 수 없는 심행처가 끊어진 절대 자리다.

그러니 그 가운데 어찌 법이 있고 법 아님이 있으리요.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일생 동안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 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마하가섭에게 법을 세 번 전한 소식이
삼처전심이니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다자탑전분좌(多子塔前分半坐)
니련하반곽시쌍부 (泥蓮河畔槨示雙趺)이다.

2.

본래 있는 법을 부촉하여 전하는 것이니 없는 법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법이란 있는 법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니

전한 뒤에는 없는 법이라 말을 한다.


만일 마음은 형체가 없으므로 형상을 가히 볼 수 없다고 하며,

성품은 언어가 끊어졌으므로 말로 가히 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참으로 성품을 본 사람이 아니니

이에 마음의 형상과 성품의 체가 완연히 눈앞에 있어서

눈을 궁굴리지 아니하고도 능히 보며

입만 열면 바로 말할 수 있어야 가히 밝게 불성을 본 사람이다.

또 성리를 말로 다할 수 없다고 하나 또한 말로도 여실히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3.

마음과 법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이니 집착하면 마음과 법에는 크게 어긋난다.

4.

금강경에 여래선호념제보살(如來善護念諸菩薩)하시며

선부촉제보살(善付囑諸菩薩)이라 하시었으니

여래의 호념지도(護念之道)를 말씀하신 것이다.

여래의 호념은 언제나 알뜰히 챙겨 주시고 살펴 주시고 북돋아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마음으로

일체 생령 구류중생(九類衆生)에 미치는 마음이다.
우리의 본래 성품은 그대로 있는 것이지

그 자리에는 법이다, 마음이다 붙일 것이 무엇이리요.

법이 있고 마음이 있으면 벌써 한 상(相)이 일어남이라.

그것은 마음도 본법(本法)도 아니다.

5.

미(迷)할 때는 중생도 있고 부처도 있고 마음도 있고 법도 있더니,

한 마음 통달하여 깨닫고 보니, 법도 없고 또한 법 아님도 없으며,

미(迷)와 오(悟)가 같고 마음도 없고 또한 법도 없도다.

6.

마음이 없음에 얻을 것이 없음이로다.

얻음이 있다면 마음 이 있고 법이 있음이라.

마음이 있고 법이 있으면 일만상(一萬相)과 일체 분별(一切分別)이

이에 좇아 일어남이라.

그러므로 일체제불(一切諸佛)이 이름 없는 한 법을 설할 뿐이니

어찌 법이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마음 아님을 알면

비로소 마음과 마음 법을 아는 것이니,

알았다 하 는 것도그냥 표현한 것이요. 알았다 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7.

삼계의 모든 불보살들은 형상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허공 법계를

다 자기 소유로 내는 데에 공을 들였으므로

형상 있는 천지 만물도 자기 소유로 수용하나,

범부와 중생들은 형상 있는 것만을 자기 소유로 내려고 탐착함으로

그것이 영구히 제 소유가 되지못할 뿐 아니라,

아까운 세월만 허송하고 마나니 이 어찌 허망한 일이 아니리요.

그러므로 그대들은 형상 있는 물건만 소유하려 허덕이지 말고

형상 없는 허공 법계를 소유하는 데에 더욱 공을 들이라

12.

용수(龍樹) 마명(馬鳴)을 불교의 거조(巨祖)로 여긴다.
도로써 관(冠)하고 덕(德)으로써 왕성(旺盛)하여야 한다.

성리에 근원 하지 않으면 도관 덕왕(道冠德旺)이 되지 못한다.

음양이 없는 땅 한 조각(無陰陽地一片),

메아리 없는 한 골짜기 (無音響之一谷),

뿌리 없는 나무 한 그루(無根樹一株)

16.

취이불취(取而不取)요 이이불리(離而不離)다.

취함에 취함이 아니요 떠남에 떠남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소식을 통해 버리면 취해도 법이요 떠나도 법이다.

취(取)해도 시방에 편만해 있고 떠나도 시방에 편만해 있으니

취이불취 (取而不取) 이이불리(離而不離)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능히 취(取)하기도 하고 능히 이(離)하기도 하는 것이다.
각인(覺人)의 분상에는 유무상(有無相)이 없고 여래의 분상에는 내외(內外)가 없다.
외불방입(外不放入)하고 내불방출(內不放出)하는 공부 표준을세우라.

17.

심지(心地)는 본래 무생법인(無生法印) 자리로 생 함이 없는 자리다.

그러나 또한 심지로 인해서 일어남이니

심지에는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 지나니,

인(因)의 경지에 연(緣)을 좇아 일어남이다.

연(緣)과 종(種)이 서로 방해치 아니하듯 화(華)와 과(果)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본무생(本無生)은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印) 자리니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 자리요,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자리며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 자리다.

성품의 본연체 (本然體)에는 선악이 없는 것이나

한 마음이 동함에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한다 하였으니

선악이 구공(俱空)이나 또한 인연 따라서 과(果)가 일어난다.

18.

씨앗이 있고 땅이 있으니 시절 인연 따라 싹이 발하는 것이다.

또한 인연에 걸리고 막히고 구애됨이 없을 것 같으면 생(生)을 당하되

남이 남이 아니요, 일체 경계 속에서 온갖 마음을 일으키되 일으킴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도인이 공부가 깊어지면

일은 예전과 다름없이 처리하나 점점 일없는 한가한 도인이 되나니

일만 경계(一萬境界)에 불리자성(不離自性)인데 성품에 무엇이 바쁘리요.

그 자리는 일념미생전 자리요, 일원상 자리며 천지미분전 자리다.

무생법인 자리요 일념미생전 소식을 알아서

당생생불생 (當生生不生)해 버리고 무생법인(無生法印)해 버리면

최고 여래 자리요 이 공부에 토가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7불 게송 하나만 요령 잡고 그것으로 밀고 나가면 된다.

옷깃만 스쳐도 몇 십생 인연이라고 했는데

부모나 형제나 부부나 부자가 되었다는 것은 무한한 세상에 맺어진 깊은 인연이다.

그 인연을 조금 싫다고 버리거나 미워하면 안된다.

또 조금 좋다고 죽거니 살거니 끌려 버려도 안된다.

좋거나 나쁘거나 당생생불생해 버리면 된다. 웃어 버리면 된다.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 다 바다에 던져 버려야 불보살이다.

천지 만물지역여(天地萬物之歷旅)라, 천지는 만물이 쉬어 가는 여관이다.

한 생을 눈 한번 깜짝하는 것으로 불보살들은 생각하는데

그 생을 미워하지도 싫어하지도 놓아 버리지도 않는다.

산에 가서 선(禪)만 하는 것이 불보살이 아니라

한 가정에 있으면서 가정을 잘해 나가야 불보살이다.

가정의 인연이 어느 때 만날지 모르는 것이니 그 인연을 좋게 만들어야 한다.
불교에서는 여래 자리를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 했고,

유교에서는 화이불류(和而不流),

도교에서는 희로애락 애오욕이 다 생기고 경계가 나고 나면

다 보내 버리고 해서 편안한 극락 자리에 머물러라 하였다.

그 자리하나 얻어 버리면 죽기로 애태울 것도 죽기로 걱정할 것도 다 없다.
성자들은 다 그렇게 살으셨다.

그러니 풍래소죽(風來疎竹)에 풍과이죽불유성(風過而竹不留聲)하고

안도한담 (雁渡寒潭)에 안거이담불유영(雁去而潭不留影)해야 하지 않겠느냐.

19.

본래 자리에서 볼 것 같으면 깰 것도 끊을 것도 없으며

결 불결(決不決)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법을 구하려는 구도의 정성이 지극할 때

법을 구하려는 사람에게 법을 설함이다.

여래는 살활자재(殺活自在)니 죽이고 살림을 자유자재하신다.

그러나 영겁을 통해서 보면 더욱 크게 살려 주심이다.

부처님들이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해서 죽이려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죽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끊어도 끊지 않는 것이요, 끊지 않는 가운데 또 끊는 것이다.

법을 구하는 마음이 간절해야 온통 가져 갈 수 있나니

세속 말에 우는 아기 젖 한번 더 준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부처님과는 어떻게 해서든지 인연을 걸어 두어야 한다.

20.

법계성(法界性)에 합일하여 알아 버리면

그대로 비추는 대로 통달할 것이니 바로 일과 이치에 걸림 없이 통달할 것이다.

그 경지가 사무애법계 (事無碍法界) 이무애법계(理無碍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사사무애법계 (事事無碍法界)한 자리다.

금강경의 제일 골자를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 하는데

그것이 당생생불생(當生生不生)으로 여래 자리다.

불교의 최고 경지가 여래 자리다.

여래는 내이불래(來而不來)하고 거이불거(去而不去)한 분인데,

그 자리를 유교에서는 화이불류 (和而不流)로 표현하였고,

도교에서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인데 장자는 무출이양 (無出而揚)

무입이장(無入而藏) 시립기중(柴立其中)이라고 하였다.

기독교에서는 왼손으로 준 것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고,

왼 귀로 들었거든 오른 귀로 흘려 버리라고 하였으니

기독교가 쉽게 표현하여 주었다.

"일구흡진서강수(一口吸盡西江水)나 흡진연후부서강수(吸盡然後復西江水)로다"

한 글이 있으니 바로 성리를 밝힌 것이다. 나는 다시

"일수마진계룡산(一手<指>磨盡鷄龍山) 마진연후부계룡산(磨盡然後復鷄龍山)"

이라고 지어 보았다.
점수돈오를 하나 돈오점수를 하나 돈오돈수를 하나 결국은 같은 것이니

사량계교심 없이 무생 자리에 합일할 것 같으면 그 자리가 법계성(法界性)이다.

21.

항마는 끊어야 하니 악장제거무비초(惡將除去無非草)다.

출가위부터는 호취간래총시화 (好取看來 是花)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나이까? 구자무불성(狗者無佛性)이니라.

개에게 불성이 없나이까? 구자유불성(狗者有佛性)이니라" 하였으니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불성을 드러내 주는 방편이다.

이제(今)라면 옛(古)이 되고, 옛(古)이라면 이제가 되는 것이다.

이제가 될 때 옛이 되고 옛이 이제를 떠나지 않는다 .

地天 天地 地天天 天地 地天 天地地
有無 無有 有無無 無有 有無 無有有
大小 小大 大小小 小大 大小 小大大

땅은 자꾸 하늘이 되고 하늘은 자꾸 땅이 된다.
있는 것은 자꾸 없는 데로 없는 데서 자꾸 있어지는 것이고
큰 것은 작은 데로 작은 것은 큰 데로 변화된다.

22.

마음이 일만 경계를 따라 움직이나 일만 경계가 다 삼매의 경지라

일행삼매(一行三昧)요, 동정역순(動靜逆順)이 무비삼매(無非三昧)며

사상삼매(事上三昧)다. 이 지경에 이르면 마음이 나투는 곳마다

불리자성(不離自性)이라. 그 가운데에는 기쁨도 근심할 것도 없다.

기쁘기도 근심도 해야 되지만 능히 기쁨과 근심에 묶이지 않는다.

출가위는 무희무우 (無喜無憂)다. 바보같이 "집어 잡수시오" 한다.

여래위는 활용자재(活用自在)하는 경지로

능희능우(能喜能憂)하며 일체생령(一切生靈)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자리다.

우주를 볼 때 천지 지천 천지지(天地 地天 天地地),

지천 천지 지천천 (地天 天地 地天天)의 경지를 뚫어 봐야 한다.

그래야 한량없는 힘이 생기고, 수도의 힘이 생기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공부하는데 심사를 모셔야 되고 심우를 가져야 된다.

심우가 열이 있으면 능한 바가 혼합되어 같이 커 나간다.

또 심계가 있어야 한다.

성리의 표준이 "불리자성왈공(不離自性曰工)이요,

응용무념왈덕(應用無念曰德)이라"고 한 말씀이다.

자성을 떠나지 않는 것을공부라 하고,

응용에 무념하는 것을덕이라 하니, 둘을 겸해야 된다.

23.

오유십오이지우학(吾有十五而志于學)하고 . . . . . . . . . . ..보통급
삼십이입(三十而立)하고 . . . . . . . . . . . . . . . . . . . . . .특신급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하고 . . . . . . . .. . . . . . . . . . . .상전급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하고 . . . . .. . . . . . . . . . . .항마위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하고 . . . . . . . . . . . . . .. . . . . . 출가위
칠십이종심소욕(七十而從心所欲)하여도 불유거(不踰矩)라. ..여래위

24.

불조의 법맥은 신(信)으로 통하고 사은(四恩)의 윤기는 보은으로 건넨다.
정설(正說)은 스승의 말씀이요, 깨침의 말씀이요, 부처님의 말씀이다.

금강경에 "여래는 시진어자(是眞語者)이며, 실어자(實語者)이며,

여어자(如語者)이며, 불광어자 (不?語者)이며,

불이어자(不異語者)니라"고 하시었으니 그것이 바로 정설이다.

그러므로 정설을 알아보는 때에,

즉 지각하는 때에는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이 마음일 뿐이며,

마음이 관하고 자각하는 것이요, 다른 것이 들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각할 때에 이제가 있을 뿐이다. 이제인즉 진성현전(眞性現前)이다.

그러므로 앞 경계도 끊어지고 뒷 마음도 끊어져서 분별 시비가 없는 경지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는 생각할 것도 없고 말할 것도 없다.

오늘 이 순간 내가 대하는 일, 대하는 물건, 대하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25.

참 성품이 심지(心地)에 감추니 참 성품은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다.

또한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으며 없다 하는 그것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만 경계에 응(應)해서 사물에 변화하나니

수도인의 공부가 여기에 들어 있다.

응연이화물(應緣而化物)하니 모두가 다 지혜를 이름이요,

또 강연이 지혜라 이름하는 것이다.

大地虛空心所現 (대지허공심소현)이요
十方諸佛手中珠 (시방제불수중주)로다
頭頭物物皆無碍 (두두물물개무애)하니
法界毛端自在遊 (법계모단자재유)로다


대지 허공은 다 마음의 나타난 바인데 마음이라는 것은 바로 참 성품이다.

아무리 대지가 크고 넓고 또 허공이 비어 한이 없다 할지라도

성자들의 마음속에 든 것이다. 천지가 큰 것도 아니고 땅과 허공이 큰 것이 아니다.

삼세 제불 제성과 시방 제불이 손안에 구슬이다.

그 이치를 알아 가지고 살기 때문에 구슬이다.

두두(頭頭)는 대(大) 자리요, 물물(物物) 은 소(小) 자리로

대소유무에 걸림이 없다는 말이다.

법계는 대 자리요, 모단은 아주 최소의 자리다.

대소유무 이치에 자재하기 때문에 이무애법계 사무애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법계가 법계모단에 자재하며 거닌다.

부처님 말씀에 일모단(一毛端)에 현보광찰(現普光刹)이라 했다.

털끝보다 더 작은 곳에 보광찰이다.

보광찰은 천지를 몇 억 만배 갊은 것이 보광찰이다.

모(毛)는 작고 작고 보니 나중에 대(大)가 되었다.

크고 크다 보니 또 작게 되었다. 큰 것과 작은 것이 둘이 아니다.

26.

심지에 모든 종자가 갊아 있으니

선심(善心)도 악심(惡心)도 나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로 인해서 나옴이다.

대소유무의 이치를 보아다가 인간의 시비이해를 건설하나

다시 역으로 일속에서 대소유무 이치를 찾는 것이니 둘이 아니다.

정진하고 정진하여 불과(佛果)가 가득할 것 같으면 보리가 두렷하리니

한 꽃이 피니 세계가 일어나더라.

한 꽃은 바로 우담발화요, 도화(道花)요, 무궁화요, 일원화(一圓花)니

그 한 꽃이 달마에 의해서 피고 보니 중국 천지에 우담발화가 크게 핌을 말함이다.

본인의 한 마음 한 작용이 무서운 것이다.

초조(初祖) 달마의 앞길을 예언한 것이다.

사람도 일생 생활하는 가운데 화개세계기(華開世界起)가 되어야 한다.

화멸세계멸 (華滅世界滅)이 되어서는 안된다.

대소유무의 이치를 보아다가 인간의 시비이해를 건설하는 것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항시 억양 반복해야 한다. 하나에 결정을 해 버리면 안된다.

33.

法本法無法

법은 본래 무법에 법하였고
無法法亦法

무법이란 법 또한 법이더라.
今付無法時

이제 무법을 부촉할 때에
法法何曾法

법이란 법을 무엇을 일찍 법할 것이냐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변산의 아홉 구비 길에 돌이 서서 물소리를 듣고 다 성불 제중을 했더라.

또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 (非非亦非非)더라.

없고 없고 또한 없고 없는 것이요, 아니고 아니고 또한 아니고 아닐레라.

유는 무로 무는 유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구공 역시 구족이라

석가모니불 이래의 삽삼조사가

계 정 혜 즉 잠심 연심 정심의 이취공부로 필득 여의보주하여

삼천년의 법맥을 전해 주셨는데

그 가운데 특히 달마 대사께서는 동토에 오시어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으나

면벽 9년에 혜가를 만나시고 법을 전하시면 서 게송을 읊으시니,

吾本來玆土

내가 이 땅에 와서
傳法救迷情

법을 전하여 어리석은 중생들을 제도하려고 한 뜻이라.

一花開五葉

한 꽃에 다섯 잎이 열리니
結果自然成

결과가 자연히 이루어졌다

그래서 최후에 법을 넘기어 동토에 전하여졌고,
3조 승찬은 때가 아니기 때문에 30년간에 신심명(信心銘)을 읊으시고,

華種雖因地

꽃의 종자가 땅을 인연하여
從地種華生

땅으로 좇아 종자는 꽃이 남이라
若無人下種

만약 사람이 종자를 심지 않으면
華地盡無生

꽃과 땅이 다 남이 없도다

하여 노력과 정성을 바친 것이고,

6조 혜능대사는 지체가 부자유 한 분으로서 법을 얻어 가지고

대중이 다 따르지 않기 때문에 사냥꾼의 뒤를 따라다니며 짐을 지고 다니셨으나

육식도 않고 계문을 지키면서 16년간을 보임함축(保任含蓄)하고

묵언안식(默言安息)하는 공부를 하여 생불(生佛)이 되어

일반 대중에게 게송을 내리시기를,

心地含諸種

마음 땅에 모든 종자를 머금었다가
普雨悉皆生

너른 비에 모두 다 남이라
頓悟華情已

돈연히 화정한 것을 깨치니
菩提果自成

보리과가 자연히 이루어지더라

하는 게송을 남기셨다.

한 울안 한 이치에 한 집안 한 권속이

한 일터 한 일꾼으로 일원 세계 건설하자

공자님께서는 10철(哲) 과 72현(賢)의 제자를 두셨는데

하루는 대중을 모아 놓고

"여욕무언(余欲無言)하노라 <내가 말을 않고자 하노라>"하시니

자공이 가로되 "자여불언(子如不言)이시면 직소자하구언 (則小子何求焉)이리요

<스승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면 저희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하니

자왈(子曰) "천하언재(天何言哉)요<하늘이 무슨 말씀하더냐>"

그러나 "사시행언 (四時行焉)하며<사시를 순환시키며>

백물(百物)이 생언(生焉)하나니 천하언재(天何言哉) 시리요

<백물이 생하나니 하늘이 무슨 말과 하염이 있느냐>"

이 말씀이 불교의 무자(無字) 법문이다.

최고의 진리는 다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양 당신의 어려운 일이나 예무를 당하면

당신이 알았다 할지라도 당신이 알았다고 자랑하지 않으시고

내가 노자님에게 물으니 노자님이 이러고저러고 하시더라 하며 겸손하셨다.

그 반면에 노자님께서는 주세성자가 공자님이 되셨는데,

당신이 나설 수 없으니 복중팔십 년(腹中八十年)을 머무르고 공자님에게만 미루었다.
도덕경은 어떻게 썼느냐 하면 어디를 가다가

어떤 노숙한 주인 하나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노자님에게 한 말씀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하루 저녁 말해 준 것이

도덕경이 되었다 고 한다. 법을 안 내놓으시고 공자님에게 미루시었다.

그리고 공자님께 제자들이 과거의 요순우탕 문무 주공을 세면서

그 어른들이 성현들이 아니십니까? 하니 그 어른들이 큰 분야를 맡고

큰 일을 하고 가신 어른들이라고 인정해 주시고

그 어른들을 숭배하고 받드는 도가 어그러지지 않으셨다.

또 성현이 어디 계십니까? 하고 여쭈니 내가 들으니

서방에 유성현(有聖賢)한데 불치이불란(不治而不亂)하고,

서방에 성현이 계신데 다스리지 않아도 어지럽지 않고,

불언이자신(不言而自信)하고 말씀 안해도 스스로 믿게 되고,

불화이자화(不和而自和)니라, 화하지 않아도 스스로 화하나니라.

하시며 내가 생각해 보니 그분이 성현이 아닌가 모르겠다고 하시며

겸손과 양보의 미덕을 남기셨다.

이와 같이하셨기 때문에 고등 종교인이 되셨다.

공성신퇴(功成身退) 호작선연 (好作仙緣)

공을 이루고 몸은 뒤로 미루고 선연을 지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부귀를 주는 것보다

가난을 주는 것이 너희에게 큰복이 될 것이다

불원천(不怨天) 불우인(不尤人)

하늘도 원망 하지 않고 사람도 원망하지 않는다

천지만물포태성 (天地萬物胞胎成) 일월일점자오조(日月一點子午調)라,

천지 만물이 포태해서 이루어졌는데 일월 한 점이 자오로 고르더라

위대한 힘을 가진 성자, 철인이나 위인 달사들도

때가 아니면 거기에 투쟁하고 거기에 비루 하지 않고

대휴대헐(大休大歇)해서

크게 쉬고 크게 쉬어서 다시 영생과 영겁을 준비하고 함장하는 기간을 갖기 위해서

보임함축(保任含蓄)하고 보임해서 함축하여

나가대정(那伽大定)을 길러 내고 묵언 (默言)으로써 안식(安息)하고

포도잠거(抱道潛居)하고 도를 품어 안아 잠거하고

괄랑순회(括囊順會) 입주머니 돈주머니를 닫아 가지고 때를 기다리고

도광산채 (韜光 彩) 헛된 허세를 감추고 반짝이는 모든 무늬를 없애고

묵빙응제(默氷應濟)

남에게 뜨거운 기운을 주지 않고 서늘한 기운을 주어서 다 제도하고

수순인정(隨順人情) 인정에 수순해서

인정도덕(人情道德) 인정이 도덕이니 도덕을 베풀고

둔신양도 (遁身養道) 몸을 숨겨서 도를 길러 내고

둔세제세(遁世濟世) 세상에 숨어서 세상을 건져서

심청신강(心淸身康) 내 마음을 맑히고 몸을 건강히 해서

만사여의(萬事如意) 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겠다.

그러기로 하면 대인군자(大人君子) 진퇴(進退)의 도가 있어야 할 것이니

우리는 만대를 나갈 때 법으로 철학으로 중도로 살아가야 하겠다.

posted by 푸른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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