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2021. 11. 16. 18:03

GOD I AM,

From Tragic To Magic
by Peter O. Erbe
비극에서 마법으로


당신이 참으로 행복하다면,
당신의 삶이 심오한 목적으로 가득한 기쁨의 표현이라면,
그리고 무엇도 부족하지 않다면,
말하자면 당신을 존재케 한 영성과 당신이 하나라면,
당신은 이 다음 부분을 읽을 필요가 없다.
당신은 이미 신(神)과 함께 걷고 있으니. 


 

나는 보물을 발견했다.
나는 그것이 지상의 모든 영혼의 타고난 유산임을 알았다.
그 씨앗에서 자라는 것은 사랑의 나무이고,
그것의 열매는 사랑의 열매이다.
나는 지금껏 자신의 열매를 주면서 기뻐하지 않는 나무를 본 적이 없다.

 

사과나무는
자신의 외부에서 사과를 찾아 자기 가지에 붙이려하지 않는다.
사과나무는 자신의 사과에 집착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라고 선언하지도 않는다.
그렇다. 사과나무는 주는 법을 안다.
사과나무는 자기 노동의 열매에 신경 쓰지 않고,
열매를 맺는 것 자체를 즐긴다.
이런 정신으로 일하는 사람은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임을 안다.

 

소유물의 본성은 소유자를 소유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소유하려는 욕심으로
자신을 물질과 사람과 교리와 개념과 힘의 노예로 만든다.
소유하려는 충동은 정도에 관계없이
언제나 그 자취 속에 슬픔을 지니게 마련이다.

 

 

기억하라. 신은 사랑임을.

 

인간 영혼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잊고 있던 날개를 펴서 자신도 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하라.
때때로 거짓된 세상 속으로 다시 빠져든다고 해서 자신을 비판하지 말라.

 

사랑이 있는 곳에 풍요가 있다.
참된 인식과 하나임에 도달하는 과정을 속죄(atonement)라고 한다.

 

사랑의 길을 따르는 사람은
언제나 적절한 때와 장소에 있는 장소를 발견하기 마련이다.

 

우주에서는 
그 어떤 것도 영원히 길을 잃는 일은 없다.

 

삶은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걸 즐긴다.
이것이 받아들임의 예술이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위대한 선물도 줄 수 없는 법이다.
우리가 거지로 있는 것은 선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아서이다.

 

물질세계란

인간의 의식을 비추는 하나의 거대한 거울이다.

 

질병이란 삶이 배우지 못한 교훈을,
아니 우리가 다른 식으로 배우기를 거부하는 교훈을
신체를 통해 지적하는 한 방법이다.

 

공간과 시간은 실제로는 여기와 지금이며 그것은 하나다.
그것은 물질 영역에서 나타나는 연속하는 여기와 지금일 뿐이다.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을 바꾸려하지 말라.
참된 인식은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육신으로만 가치 있게 볼 때. 그릇된 인식이 고정된다.
우리 모두는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다.
그리고 진정한 여성 해방의 답은
여성을 남성에게서 해방하는 데 있지 않고,
여성을 분리에서 해방하는 데 있다.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온 기도는 인간이 자신의 '참 나'인
'그리스도 나'와 다시 접촉할 수 있는,
알려진 것들 중에서 가장 고귀한 방식이자 가장 뛰어난 도구이다.

 

참다운 기도는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참된 기도는 삶을 존경하고 찬미하며 삶의 기쁨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니 내 기도가 나 자신의 것이 되게 하고,
절대로 어떤 사람이나 교리의 것이 되지 않도록 하라.

 

어린아이가 어둠을 무서워하듯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빛이 비치는 곳에는 어둠이 있을 수 없다.
죄의식이란 언제나 배우지 못한 교훈을 의미하고
모든 두려움은 죽음의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 동기가
두려움에 근거하지 않았는지 자문해 보라.
만일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면
그것은 환상의 목소리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참된 인식은 내일 역시 그냥 또 다른 지금이라는 것을 안다.
어제의 지금은 가버렸고 내일의 지금은 자신을 다듬고 있다.
해가 떠서 지는 동안인 오늘의 지금 속에서 참된 인식이
자신에게 할당된 해결하는 것은 모두 지금 이 순간이다.
시간이 모자란다는 생각 같은 것은
참된 인식에게는 거짓자기가 생각해 낸 또 다른 부족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만든 감옥 속에서 살고 있는데,
이 감옥의 창살을 버텨주는 힘은 판단이다.
우리가 판단을 내려놓는 순간 창살은 무너지고
우리는 자유 속으로 걸어나갈 것이다.

 

 

서기 533년 유스티아누스 교황의 재임시기에
바티칸 공의회에 모인 카톨릭의 원로들은 윤회사상이

신의 심판과 교회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것을 우려하여 
경전에서 환생과 관련된 모든 가르침을 빼버리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그 무엇이든 우리가 에너지를 주는 것을 권능 있게 만든다.
우리가 사랑하면 사랑을 권능 있게 만들고,
두려워하면 두려움을 권능 있게 만든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이나 내 체험으로 나타난다.

 

나무는 위로도 자라지만 똑같이 아래로도 자란다.
가지가 뻗어나가듯 뿌리 역시 뻗어나간다.
모든 악은 처벌받고 모든 덕은 언젠가 보상받는다.

 

우리의 다음 순간을 설계하는, 우리 외부의 신(神)이라는 것은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다. 우리가 바로 그 신(神)이다.
자신은 신(神)이 아니라고 꿈꾸는 신(神).

 

우리 이웃이 저지른 잘못을 명분으로 우리가 그들을 비난하는 한,
우리 역시 똑같은 광기(狂氣)의 소리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선(善)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저 밖에서 벌받을 누군가를 찾아내는 한,
우리는 제 정신이 아니다.

 

자신의 '참 나'를 믿는 사람은
신성한 법칙에 복종하는 것으로 진정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
그는 세상이 인정하든 않든 자기 나름의 기준을 설정하고,
'참 나'라는 인간의 본질로 돌아가 신의 법칙에 따라 산다.
따라서 그에게는 자신이 법이다.

 

'나(I)'는 너 속의 '나'이다. 우리는 하나다.
모든 것에 충만한 오직 '한' 영성(聖靈)만이 존재하니. 그것이 나다.
나는 기쁨이요, 사랑이요, 평화다.
'나'의 계속되는 있음 속에서 '나'는 창조주이고,
영원한 존재인 내 영원의 바다 속 모든 것을 통해서
나 자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나의 창조물은 삶의 춤이다.
나는 창조주이고
너희를 통해 나 자신을 경험하는 창조물은 나의 '나'이다.

 

'나'는 너다. 우리는 '하나'다.

'나'는 '존재 전체'이고, 신이며, 최상의 거룩함이고,
내 존재의 성스러운 봄이며, 생명의 샘이다.
'나(I)'는 너의 '나' 역시 '나'로 보기에 우리는 '한 나'이다.
우주 전체를 통틀어 오직 하나인 '나'만이 있으니,
너의 '나'보다 더 위대하고 더 가치 있는 현명한 '나'는 어디에도 없다.
'나'의 개체 표현이 꿈을 꾸느라
잠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한 나' 이다.

 

두려움이란
우리의 신성한 근원인 '신적 존재로서의 진정한 나(God I Am)'와
우리를 분리시키는 환상의 장막에 지나지 않는다.
두려움을 벗어버리자면
먼저 그것의 본성과 원인을 깨달아야 한다.

 

두려움 없는 마음상태란 조건 없는 사랑,
자신이 창조주와 온전히 하나임을 의식하는 영혼이다.
그것은 가장 뛰어난 의식이며 초월 의식이다.
이런 사람은 세속의 어떤 역경에도 영향 받지 않는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주는 것은 피해가 아니라 하나의 체험,
배울 기회이며, 양자는 그 사건 전체를 공동으로 창조한다.

 

판단이 없으면 비난이 있을 수 없고,
비난이 없으면 죄도 있을 수 없다.
죄가 없다면 용서 또한 무의미하기 때문에
용서할 필요가 없는 상태란 결국 순수존재인 순결함의 상태,
즉 깨달음의 상태일 수 밖에 없다.

 

참된 인식의 눈으로 보게 되면 누구나 자기 나름의 선택을 하고,
누구나 자기 인생을 책임진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다.
신의 사랑은 당신이 누구이고 어떤 상태이며 무엇을 하는가에 좌우되지 않는다.

 

 

짓밟힌 자들에게는 참된 희망이 존재함을 말해주고,
냉소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길을 보여 주라.
슬퍼하는 사람들에게는 웃는 법을 가르쳐주고,
희생자들에게는 남은 행복을 선택하라고 이야기하라.

 

불친절하고 무자비하다고 비난하지 말고
살아있는 모든 것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하라.
당신의 적은 용서로 받아들이고
굳어진 가슴은 사랑으로 부드럽게 풀어주고
헐벗은 자들에게는 영성(靈性)의 존엄함을 돌려 주라.

 

아이들이 태고의 진부한 두려움에 물들지 않게 하고
그들을 위대한 운명으로 이끌어 주라.
무엇보다도 형제자매들이 하늘에서 기억될 수 있도록
모든 생명이 하나임을 이야기하라.
판단은 씨앗을 분열하게 만드는 토양이니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놓고 판단하지 말라.

 

기도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바깥의 신에게가 아니라
자신의 '참 나'에게 기도하라. 바로 이것이 신이다.
그럴 때 당신의 기도는 언제나 응답 받을 것이다.

 

부디 당신 자신에게 친절하라.
웃음과 춤으로 삶을 축하하라. 이것이 신의 의지이다.
환호하고 산꼭대기에서 노래 불러라.
당신이 영원할 것임을 알고.
이 앎 속에서 기쁘고 활기차게 살아라.
참다운 당신 자신을 찬미하라.
그것이 곧 신을 칭송하는 것이니.

 

우리가 함께 하는
이 여행의 목적지는 당신의 '참 나'이다.

 

고대 산스크리트어에 Namaste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내 안의 신이 당신 안의 신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뜻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참 나'도 존재한다.
언제나 이런 이해가 가져다줄 평화가 당신의 영혼을 달래주기를...
소박하고 친절한 마음들에게 축복 있기를...

 


 

페테르 에르베 지음 / 조경숙 옮김
도서출판 / 아름드리미디어 (1998) 

posted by 푸른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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