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2022. 1. 29. 17:56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대한 작가의 후기(後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여러 가지 해적판이 많이 나도는 데 대처하기 위하여 나는 1929년에 프랑스에서 한 권에 60프랑짜리 염가 보급판을 발행했다. 이것으로 적어도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유럽에서의 수요가 충당되기를 바랐다. 미국에서 해적판이 출현한 것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뉴욕에서는 원본이 피렌체로부터 미국에 도착해서 채 한 달도 채 되기 전에 벌써 최초의 해적판이 팔리고 있었다. 이것은 원본에서 만들어 낸 사진판으로, 어엿한 서점에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독자들에게 마치 원본의 초판인 것처럼 팔고 있었다. 같은 원본의 초판본이 10달러인 데 비해 해적판은 보통 15달러 정도였다. 그러나 해적판 구입자들은 기꺼이 이 사기 행위에 걸려들고 있었다. 이 용감한 행위를 흉내 내는 사람은 차례차례로 늘어났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심지어 뉴욕이나 필라델피아에는 이것과는 또 다른 사진판이 있다고 하고, 나 자신도 그 오렌지색의 크로스 장정에 녹색 라벨이 붙은 책을 가지고 있는데 상당히 불결한 느낌을 주었다. 이것도 역시 사진판 책이었는데 잉크가 번진 듯했으며 나의 가짜 서명이 그려져 있었다. 아마도 이 해적판 출판자가 자기의 어린 아들에게라도 시킨 모양이다. 이 판은 1928년 말에 뉴욕에서 런던으로 건너와 한 권에 30실링으로 팔렸다.

그러나 이때 나는 플로렌스에서 제2판 이백 권을 한 권에 일 기니(21실링)로 출판했었다. 나는 이 판을 한 두권 정도 내 곁에 두고 싶었지만 이 오렌지색의 불결한 해적판에 대항하기 위해 세상에 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출판한 것은 부수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오렌지색 해적판이 여전히 나돌았다.

또 한편, 내게 매우 음침한 느낌이 드는 판본이 있다. 표지가 검고, 성서나 두꺼운 찬송가책처럼 어두워 보인다. 이 판에는 진지함뿐만 아니라 진실성까지도 나타나 있다. 이 책의 속표지는 한 페이지가 아닌 두 페이지다. 모든 페이지에 미국을 나타내는 독수리 그림이 인쇄되어 있고, 독수리의 머리는 여섯 개의 별로 장식되어 있으며, 발에서는 전광이 방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 그림 전체에 월계관을 이고 있다. 이 월계관은 이번의 문학적 도둑 행위를 표창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것은 사악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

얼굴을 검게 칠한 해적 키드 선장이 이제부터 널빤지를 건너게 해서 바다 속에 빠뜨리려 하는 남자를 보고 설교하고 있는 것 같다. 왜 이 해적판에 이와 같은 거짓을 꾸미는 속표지가 한 장 덧붙여져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이 속표지는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사악한 지성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이 책도 역시 사진판인데 웬일인지 서명은 말소되어 있다. 이 한심한 책의 가격은 파는 사람의 기분과 사는 사람의 어리석음에 따라 결정되는데, 십 달러, 이삼십 내지 오십 달러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미국의 해적판은 적어도 세 종류가 되는데, 나는 그 밖에 한 종류 더, 역시 사진판으로 된 해적판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러나 현품을 나는 보지 못했으므로 그것은 믿고 싶지 않다.

유럽에도 한 종류의 해적판이 있다. 이것은 천오백 권으로 되어있는 판으로 발행처는 파리의 어느 서점인데, '독일에서 인쇄'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 정말로 독일에서 인쇄되었는가의 여부에 대해서야 어찌 되었든, 이것이 인쇄되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것은 원본의 틀린 철자가 몇 군데 교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진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책으로 원본과도 아주 닮았다. 그것은 서명이 없는 것과 책 뒤의 귀퉁이에 녹색과 황색의 비단 천을 바른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이 책은 일반 서점에는 한 권에 백 프랑으로 팔리고, 독자들에게는 삼백 내지 사백, 혹은 오백 프랑에 팔리고 있다. 그런데 책에 가짜 서명을 하고는 이것을 서명이 들어 있는 원판이라 하여 팔고 있는 매우 괘씸한 책장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런 일은 모두 상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도와주는 사람도 있다. 해적판은 절대로 매매하지 않는 서점 주인도 있는데, 그들은 감정적으로나 상업상의 배려로나 그런 짓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서점 주인들은 해적판이라도 판다. 그렇다고 그다지 열심히 파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기왕이면 진짜 판을 팔고 싶은 것만은 분명하다. 비록 해적판을 완전히 내몰 만큼 강하지는 못할지라도 사실 그들은 해적판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해적판들은 나의 아무런 승낙도 없이 발행되었고 나는 그 어떤 곳에서도 돈 한 푼 받지 않았다. 그러나 다소 가책을 느낀 뉴욕의 어떤 서점주가 내게 약간의 돈을 보내왔다. 그는 이것이 그의 서점에서 판 책에 대한 십 퍼센트의 인세(人稅)라고 했다. “이런 돈은 물통에 떨어뜨린 한 방울의 물에 불과하다는 것쯤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써 보냈다. 물론 이것은 “물통에서 넘쳐흐른 한 방울”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적은 금액이라고는 하나 한 방울치고는 목돈이었으므로 해적판이 물통에 모은 돈은 상당한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유럽의 해적들은 뒤늦게나마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해 왔다. 그들은 소매서점 주인들이 완고한 것을 알자 내게 이제까지 팔린 부수와 앞으로 팔릴 예정 부수 전부에 대해 인세를 지불하겠으니 그 대신 그들이 갖고 있는 판을 인가하라는 것이었다. 그럴까? 하고 생각했다.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마당에 이 정도야 상관없지 않은가? 그러나 결단을 내리려고 하자 역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유다는 언제나 키스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의 키스를 받으면 나도 그에게 키스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간신히 원판에서 이 사진 제판한 소형판본을 출판하기로 했다. 값은 육십 프랑. 영국 출판업자들은 내게 다이제스트 판을 만들도록 권했다. 틀림없이 굉장히 팔릴 거라고 했다. 아이들의 모래 장난용 작은 물통에 하나 가득 찰 정도의 돈은 충분히 벌 수 있을지는 모른다! - 그들은 또 세상에 호화찬란하다고까지는 않더라도, 이 훌륭한 소설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권유에 따라 다이제스트 판 제작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런 짓을 하느니 차라리 자신의 코를 가위로 잘라 버리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책도 피를 흘리는 법이다.

심한 반발이 있었지만 나는 이 책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필요한 정직하고 건강한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처음에는 커다란 충격이었던 말도 시일이 지나면 대수롭지 않게 된다. 이것을 습관에 따라 정신도 타락하는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아니, 그렇지는 않다, 글씨가 놀라게 한 것은 눈뿐이고 정신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을 갖지 않은 사람들의 놀라움은 언제까지나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별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정신력이 있는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놀라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또 실제로 결코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어떤 도움을 받은 것으로 느끼기조차 한다.

문제는 모두 여기에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들의 문화에 내재(內在)하고 있는 여러 가지 금기를 견디어낼 만큼 진화되어 있고, 그만한 교양도 있다. 이것은 깊이 명심해야 할 매우 중대한 사실이다. 아마도 십자군 전사자들에겐 말이란 것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계시적인 것이었으리라. 이른바 외설적인 말의 자극력은 중세기 사람들의 둔하고 몽롱한, 그리고 격한 성질에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니 아마 오늘날에도 지둔(遂鈍)한, 아직 눈뜨지 않은 저열한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교양 있는 사람이라면 설사 어떤 말을 듣더라도 원래의 정신적인 것인 지적, 상상적 반응을 나타낼 뿐이다. 사회적인 품성을 파멸케 하는 격하고 분별없는 육체적 반응 따위에는 인연이 멀 것이다. 옛날 사람들의 정신은 너무 약하거나 또는 너무 미숙하기 때문에 자기의 육체라든가 육체의 역할을 명확하게 구별할 줄을 모르고, 육체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는 언제나 몸을 태우는 듯한 육체적인 반응과 혼돈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런 일이 없다. 문화와 문명은 우리에게 그러한 반응을 떼어 버리도록 가르쳤다. 우리들은 지금, 반드시 사고 뒤에 행동이 따르는 건 아님을 알고 있다. 사실 이 사고와 행동, 말과 행위는 제각기 다른 의식 형태이고 우리는 그에 의하여 두 개의 다른 생애를 보내고 있다.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는 것이 우리에게는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할 때에는 행동하지 않고, 행동할 때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고에 따라서 행동하고, 행동에 따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고하는 동안은 정말로 행동할 수 없고 행동하는 동안은 정말로 생각할 수 없다. 사고와 행동이라는 두 가지 형태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이 이 책의 요점이다. 나는 남자도 여자도 성()을 충분히, 완전히, 정직하게, 청결하게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가 성에 대해 완전히 만족스럽게 행동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사고에 있어서만은 완전하고 청결했으면 한다. 아직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 같은, 젊은 처녀나 청년들이 성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넌센스다. 처녀니 청년이니 하는 것은 혼란된 고뇌인 것이다. 나이만이 그것을 하나하나 풀어갈 수 있는 성적인 감각과 성적인 사고의 혼란물인 것이다. 성에 대해 솔직히 오랫동안 생각하고, 그 속에서 버둥거리는 동안에 어느 틈엔가 겨우 우리는 가고 싶은 곳에 도달하는 것이다. 진정한, 완성된 순결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거기서 비로소 우리의 성에 대한 행동과 사고는 조화를 이루고 서로 간섭하는 일 없는 완전한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나는 구태여 모든 여자들에게 산지기를 애인으로 두고 쫒아 다니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산지기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뒤를 쫓아다니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남녀들은 성적인 간섭에서 벗어나, 성을 떠난 완전히 티없는 상태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것이다. 또한 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다. 우리의 시대는 행위의 시대라기보다는 인식의 시대이다. 행위, 특히 성행위는 과거에도 인류 역사와 함께 있어 왔었고 싫증이 날 만큼 계속 되풀이되어 왔다. 그러나 그에 대응할 만한 사고나 인식은 없었다. 바야흐로 우리는 성을 인식해야 할 시점에 있다. 오늘날 성에 대한 완전한 인식은 성행위 그 자체보다 중요하다. 몇 세기 동안의 혼란을 겪고 난 지금, 사고는 지식을 요구하고 있다. 완전한 지식을 요구하고 있다 육체는 사실 매우 쇠퇴해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성행위는 반은 장난이다. 요즘 사람들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하고 성행위를 한다. 그런데 실제 성에 흥미를 갖는 것은 마음 쪽이고, 육체는 마음의 자극을 얻지 못하면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의 조상들이 성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인식도 없이 다만 부지런히 그 행위만을 되풀이해 왔기 때문에 이 행위는 점점 기계적이고 둔감한 하찮은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이 경험을 되살리는 것은 신선한 지적 인식뿐이다.

성에 있어서, 아니 온갖 육체적 행위에 있어서도 사고는 뒤떨어져 있는 것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의 성에 대한 사고는 뒤떨어져 있고 몽롱해져 있다. 그것은 거칠고 어딘지 모르게 야수적이었던 우리 조상들의 잠재된 성은 천박한 것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그다지 진화되어 있지 않다. 성과 육체 면에서 우리의 정신은 아직 발달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뒤떨어진 것을 되찾고 육체의 감각과 경험의 의식, 즉 감각과 경험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행위의 의식과 행위 그 자체의 균형을 회복해야만 한다. 이 두 가지에 조화를 가져오는 다시 말해서 성에 대해서 올바른 경의를 품고, 육체의 미묘한 경험에 대해서 올바른 두려움을 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고가 육체를 경멸하고 두려워하고 또 육체가 정신을 증오하고 반항할 때 비로소 외설이 생긴다.

바커 대령의 이야기를 읽으면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있다 바커 대령은 남장한 여자다. 대령은 어떤 여자와 결혼하여 5년 동안 행복한 부부 생활을 보냈다. 가련한 그 아내는 자신은 남편을 맞아 정상적이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속임수가 드러났을 때, 이 부인이 받은 상처는 엄청나게 컸다. 이처럼 끔찍한 상황은 생각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처럼 속고 있을지도 모르는 여자, 앞으로도 계속 속을 여자는 몇 천 명, 아니 수없이 많을 것이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그들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성에 대해 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그녀들은 백치와 같다. 그러므로 이 책을 모든 처녀들에게 열일곱 살쯤 되었을 때 읽히면 좋을 것이다.

존경할 만한 교장이자 목사였으며, 오랫동안 그야말로 <성스럽고 착했던> 남자가 예순다섯 살이나 되어 법정에서 소녀 강간죄로 벌을 받은 경우도 소녀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생겼을 때, 우연히 때를 같이하여 내무장관-그도 같은 연배의 남자인데-은 성적인 문제는 적당히 처리하라는 방침을 내놓았다. 순수하기 이를 데 없는 신사의 그 사건도 그에겐 그저 별일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다. 마음은 옛날 그대로의 육체와 육체의 힘에 대한 비굴한 공포를 지니고 있다. 해방을 필요로 하는 이런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마음이다. 육체에 대한 공포는 아마도 수많은 인간을 미치게 했을 것이다. 스위프트와 같은 위대한 사람의 광기도 아마 그 원인의 일부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가 정부 셀리아에게 바친 시를 보면 위대한 정신도 공포에 사로잡혔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를 알 수 있다. 즉 이 시는 <그러나 - 셀리아, 셀리아, 셀리아도 똥을 누는구나>라고 하는, 미친 듯이 반복되는 구절이 있는 것이다. 스위프트와 같은 위대한 두뇌도 자기가 어느 정도로 바보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물론 셀리아도 똥을 누기는 한다! 똥을 누지 않는 사람은 없다. 만약 그녀가 똥을 누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더 절망적이다. 그러나 불쌍한 셀리아여, 그녀는 <연인> 때문에 자기의 자연스러운 생리를 나쁜 것이라고 느끼게 되고 말았다. 무서운 일이다. 그 원인은 말이 강력히 금기시되거나, 육체적으로 성적으로 마음을 충분히 발육시키지 않은 데에 있다.

청교도들이 곤란할 때 입을 다물어 버리는 방법은 성에 관한 저능아들을 만들어 냈지만, 오늘날에는 이와 반대인 젊고 혈기왕성한 지식인이 있다. 이들은 어떤 일에 관해서든 입을 다물지 않을 뿐더러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진보적인 젊은이는 육체를 두려워한 나머지 그 존재를 부정하는 짓을 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육체를 일종의 장난감으로 즐기는 정반대의 극단적인 방법을 취한다. 이것은 다소 지저분한 장난감이지만, 이 때문에 파멸에 떨어질 때까지는 조금은 즐길 수가 있다. 이런 젊은이들은 성의 중요성이니, 하면 비웃는다. 그들은 성을 한 잔의 칵테일처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칵테일을 마시며 그들보다 낡은 세대의 어른들을 비웃는다. 이런 젊은이들을 진보적인 뛰어난 젊은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채털리 부인의 사랑>과 같은 책을 경멸한다. 이 책에 씌어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너무나 단순하고 당연한 이야기다. 아무리 심한 말이 쓰여 있다고 해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 책에 씌어져 있는 사랑이 구식인 것이다. 별로 떠들 것도 없지 않은가. 칵테일 같은 거란 말이다! 이들의 말을 빌리면 이 소설의 지적인 성적 수준은 열네 살 소년 정도의 것이다. 그러나 열네 살의 소년에게는 아직 다소의 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두려움과 공포심이 있으므로 소년의 지성은 젊은 칵테일 남자보다는 건전할 것이다. 칵테일 남자는 아무것도 존경하지 않고 다만 인생을 장난감처럼 즐길 뿐이다 그 가운데서도 성이 가장 주요한 장난감인데, 이 장난감으로 놀고 있는 동안에 그는 정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야말로 헤리오가브라스(음란 방일한 생활로 유명했던 로마 황제 218-222)인 것이다.

그런데 늘그막에 이르러서는 품행이 저속해지기 쉬운 진부한 회색 청교도와,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아. 생각나는 대로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젊고 늘씬하고 의기 왕성한 남자들 사이에는 또 하나 다른 종류의 인간이 있다. 이들은 정신이 부패한 저속하고 무식한 인간이다. 그는 추한 것을 찾는다 - 그러나 이 책에 그런 것을 담아둘 여백은 없다. 그들 모두에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도착(倒錯)이 좋으면 좋은 대로 할 수밖에 없노라고. 청교도주의적인 도착, 그럴 듯한 방탕한 도착, 깨끗하지 못한 마음의 도착, 나는 나대로 나의 입장을 버릴 생각은 없다. 인생은 영혼과 육체가 조화를 이루면서 비로소 견딜 수 있는 것이 된다. 이 두 가지는 본디 서로 어울리게 마련이고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현대에는 이 둘 사이에 균형도 조화도 없다. 육체는 기껏해야 정신의 도구 정도일 따름이고, 나쁘게 되면 장난감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실업가는 자신을 <적절>한 상태에 놓아둔다. 다시 말해서 자기 사업을 위해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젊은이들 중에도 자신을 적절한 상태에 놓아두기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중의 대부분은 의식적인 자기 몰입, 즉 나르시시즘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 정신에는 판에 박은 일련의 사고방식이나 느낌이 있으므로 육체는 훈련된 개처럼 거기에 따라 반응한다. 그런 개는 진정 탐이 나건 안 나건 인간의 사랑을 바란다. 사실은 상대편의 손을 물어뜯고 싶을 정도인데도 상대가 하자는 대로 응한다. 요즘의 남자나 여자의 육체는 마치 잘 훈련된 개와 같은 것이다. 이 말은 누구보다도 개방적이라고 하는 젊은이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몸은 훈련된 개의 몸과 마찬가지다. 특히 이 개는 구식 개가 하지 않는 짓까지 하도록 길들여져 있다. 그들은 이 점에 대해 자기들이 자유롭기 때문에 참다운 생명과 그 밖의 갖가지 진실을 차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실업가가 마음 속 어딘가에 자기가 하는 일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남자나 여자는 사실 개가 아니다. 다만 개처럼 보이고 개처럼 행동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마음 속 어딘가에 크나큰 회한과 마음을 에는 듯한 불만이 있다, 느긋하고 자연스러운 육체적 자아는 마비되었든가 죽었든가 해버렸다. 육체는 이미 서커스 곡마단의 구경거리로서 연기를 해 보이는 개처럼 마련된 생활을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 뒤는 붕괴가 있을 뿐이다.

자연스러운 상태로서의 육체에는 어떤 생활이 있을까? 육체의 생활은 감정과 정서의 생활이다. 육체는 참다운 기갈을 느낀다. 태양이나 눈(雪)에서 참다운 기쁨을 발견하고 장미꽃 향기나 라일락 덤불에서 참다운 즐거움을 느낀다. 참다운 노여움, 참다운 슬픔, 참다운 사랑, 참다운 정감, 참다운 따뜻함, 참다운 격정, 참다운 미움, 참다운 한탄을 안다. 모든 정감은 육체의 것이다. 정신은 그것을 인식할 따름이다. 우리는 매우 슬픈 소식을 들어도 머릿속에서만 감동할 뿐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 잠이 들었을 때, 그 의식이 신체의 한복판에 이른다. 그때 비로소 진정한 슬픔이 심장을 에는 것이다.

지적 감각과 참다운 감각, 여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참다운 감각을 알지 못한 채 태어났다가 죽어간다. 그들은 강한 지적 감각을 가지고 분명히 <풍부한 정서적 생활>을 누리고는 있으나, 그것은 모두 가짜인 것이다. 소위 '비술(秘術)이라고 하는 요술에는 평평한 테이블 체경(體鏡) 앞에 한 남자를 세운 것 같은 장면이 있다. 이 체경이라는 거울은 남자의 허리에서 머리까지를 비춘다. 그러므로 관중은 남자의 머리에서 허리, 다음은 허리에서 머리를 보게 된다. 요술에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즉 현실의, 감정적인 자아에는 실체가 없고 다만 정신의 허상(虛像)이 있을 뿐인 생물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받는 교육은 애당초부터 우리에게 어떤 범위 내의 한정된 정감을 가르친다. 무엇을 느껴야 하며 무엇을 느껴서는 안 되는지, 또한 느껴야 할 것은 허용된 감정 내에서 그것을 어떻게 느껴야 할지를 가르친다. 그 밖의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이 새로운 경향의 책이면 속된 평론가는 - 물론 여태까지 그걸 훌륭하다고 느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한정된 수의 전통적인 고정 관념밖에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19세기와 마찬가지다. 감정의 폭을 한정하는 이 방법은 나중에는 느낄 능력마저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만다. 그 결과 우리는 그보다 고상한 정서에는 전혀 무능해지고 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요즘 세기로 그다지 오래된 것이 아니다. 보다 고상한 정서는 완전히 사멸되어 버렸다. 지금 우리는 정서의 허위물을 만들어 내야만 하게 되어 있다.

지금, 보다 고상한 정서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표현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모든 것을 포함해서 말한 사랑을 말한다. 이성(異性)을 사랑하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 동포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사랑, 보다 고상한 정서라는 사랑, 환희 , 희망 , 참다운 증오 . 정(正)과 부정에 대한 맹렬한 감각, 참다움과 허위, 명예와 불명예 등 온갖 것에 대한 참다운 신념이다. 신념이야말로 마음의 묵시적 허락을 얻는 깊은 정서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들은 오늘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죽어버렸다. 지금 그것들 대신에 있는 것은 큰소리치는 감상적인 허위뿐이다. 우리의 시대만큼 감상적이고도 참다운 감정이 결여되고 허위의 감정이 과장되어 있는 시대는 없었다. 감상과 허위의 감정을 마구 주무르는 것이 일종의 게임처럼 되어 버렸다. 모든 사람들이 이웃 사람을 앞지르려 하고 있다. 라디오나 영화는 언제나 거짓 정서를 대표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신문이나 문학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정서 속에서 뒹굴고 있다. 거짓 정서 속에서 그들은 그것을 허겁지겁 먹는다. 그 속에서 살고 그 위에서 산다. 그들은 거짓 정서를 줄줄 쏟아낸다.

때로 그들이 거짓 정서만으로 매우 잘 해나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들은 점점 더 크게 붕괴한다. 그들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자신의 참된 감정을 속여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둘 수 있다. 그러나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육체 그 자체가 보복을 한다. 마지막에는 사정없이 보복을 받는다.

다른 사람은 어떨까? 다른 사람도 대개는 언제까지나 속일 수가 있다. 모든 사람들을 거의 늘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짓 감정으로 모든 사람을 끝까지 속일 수는 없다. 젊은 남녀가 거짓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자기들 자신만이 아니라 상대편까지도 속인다. 그러나 거짓 사랑은 맛좋은 과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빵으로는 좋지 않다. 이것은 끔쩍한 정서적인 소화불량을 일으키게 한다. 거기에 현대적인 결혼이 있고, 그 이상으로 현대적인 이혼이 있다.

거짓 정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것으로 행복해지는 사람이 없을 뿐더러 진심으로 만족하는 사람도, 평화를 얻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심한 이런 거짓 정서에서 누구나 다 달아나려 하고 있다. 그들은 피터의 거짓 감정에서 달아나 아드리안의 거짓 감정으로 뛰어든다. 마거릿의 거짓 정서에서 버지니아의 거짓 정서로, 영화에서 라디오로, 이스트반에서 브라이튼으로 도망간다. 그러나 바꾸면 바꿀수록 사물은 같아지게 된다.

오늘날 사랑은 어떠한 감정보다도 더 허위에 차 있다. 젊은이에게 물어보면 알 것이다. 사랑은 그 무엇에도 지지 않을 최대의 거짓이다. 즉 사랑을 진지하게 생각하면 그렇게 된다. 사랑을 기분풀이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다면 달리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일단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젊은 여자들은 현실적으로 사랑할 만한 남자가 없다고 말한다. 젊은 남자들도 현실적으로 사랑에 빠질 만한 여자가 없기 때문에 결국 별로 원하지도 않는 상대와 사랑을 계속한다. 그것은 참다운 감정을 품을 수 없을 때는 거짓 감정을 품지 않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아무튼 어떤 감정-이를테면 사랑에 빠진다든가-을 품지 않고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참다운 감정을 갖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도 있다 그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 죽도록 당황한다. 특히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 그것을 알면.

그러나 오늘날 특히 사랑에 있어 존재하는 것은 거짓 감정뿐이다. 우리는 모두 모든 사람을-부모, 형제, 친척까지도-정서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참다운 정서를 결코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직은 정서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것으로 치고 하는 말이지만, 이것이 오늘날의 슬로건인 것이다. 그들에게 돈을 맡기는 것은 상관없다. 그러나 감정을 맡겨서는 안 된다. 그들은 틀림없이 그것을 짓밟아 버릴 테니까.

나는 사람들 사이에 이처럼 불신이 증대된 시대는 여태까지 없었다고 믿는다. 사회적 신뢰는 표면적이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순수한 데가 있는데, 내 친구 중에는 내 물건을 훔치려는 사람도 없고, 앉으면 다칠 만한 의자에 나를 앉히려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내 친구들은 나의 정서를 비웃는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현대의 정신인 것이다. 사랑도 우정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들이 모두 기본적인 정서적 동정심을 속에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거짓 사랑이 나타난다. 이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정서가 허위로 왜곡됐을 때, 이미 참다운 성(性)은 있을 수 없다. 성은 허위일 수가 없는 유일한 것이다. 그리고 성의 위조는 모든 정서적 위조 행위 중에서도 최악의 것이 되는 법이다. 정서적인 위조물도 성(性) 앞에서는 무너져 내린다. 그런데 어떻게 접근하든 성에 접근해 감에 따라 정서적인 위조 행위는 증대되어 간다. 성에 도달하기까지 그것은 증대된다. 그리고 성에 도달해서는 붕괴가 오는 것이다.

성은 거짓 정서를 맹렬히 거부한다. 성은 거짓 사랑을 사정없이 유린한다. 여태까지 한 번도 서로 사랑한 일이 없는데도 사랑하는 체하거나, 또는 정말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품고 있는 야릇한 증오는 우리 시대 특유한 것 중 하나이다. 이런 현상은 물론 다른 모든 시대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거의 온 세계적인 현상이 되고 말았다. 진심으로 상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상적인 사랑을 품고 있었다고 줄곧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굉장히 깊고 생생한 증오가 나타난다. 젊었을 때 나타나지 않더라도 이 행복한 부부가 쉰 살 가까이 되었을 무렵 -성적인 생활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무렵-까지 조용히 숨어 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큰 변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다. 우리들 시대에서 남녀를 막론하고 예전에 사랑했던 상대에 대해 품는 증오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그 증오의 형태도 매우 무섭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알면 이런 현상은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잡역부로부터 매춘부, 공작부인에서 경찰관의 아내에 이르기까지 모두 똑같다.

또 만약 남녀를 불문하고 이 같은 사람들의 증오가 거짓 사랑에 대한 유기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매우 무서운 일이다. 오늘날 사랑은 모두 거짓이다. 사랑은 진부한 것으로 타락해 버렸다, 모든 젊은이들은 사랑을 할 때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행동한다. 이것은 거짓 사랑이다. 그러므로 보복은 열 배로 강하게 되돌아온다. 성(性)은, 즉 남녀의 생식기 그 자체는 치명적이고 절망적인 노여움을 축적하고 있다. 그 자신도 남에게는 거짓 사랑밖에 주지 않는 주제에 자기 자신에게 일정량의 거짓 사랑이 안겨지면 노여움을 축적해 버리는 것이다. 사랑 속에 섞인 엉터리 요소는 마지막에는 성을-각 개인의 가장 깊은 곳의 성을-노하게 한다. 그리고 때로는 죽인다. 아니, 성을 죽인다기보다 내부의 성을 늘 노하게 한다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언제나 노여움의 시대라는 것이 있다. 이상하게도 특히 거짓 연애놀이에 가장 깊이 빠져 있는 인간이 가장 큰 노여움에 빠진다. 조금이라도 진지한 사랑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그들이야말로 가장 많이 속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런데 진짜 비극의 핵심은 우리가 철저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거짓만으로 되어 있는 사람도 참다운 사랑만을 되어있는 사람은 없다. 비록 그것이 거짓일지언정, 남녀 쌍방이 모두 작기는 해도 참다운 불꽃을 피우고 있는 결혼 생활도 많다. 그러므로 비극은 다음과 같은 점에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라는 시대에는 가짜라든가 대용품이라든가 정서의-특히 성적인 면에서의-교체가 무엇보다도 강하게 의식되고 있으므로, 그런 거짓 요소에 대한 노여움이나 불신감이 참다운 사랑의 교감인 참된 작은 불길까지도 압도하여 꺼 버리기 쉽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 작은 참다운 불꽃 덕분에 두 남녀가 행복해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대부분의 진보적인 작가에게서 볼 수 있는 가짜 정서를 언제까지나 끈질기게 되풀이하고 있으면 이런 위험이 따르게 된다. 물론 그들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이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감상적인 '달콤한' 작가들의 어마어마한 사기 행위에 대한 균형을 잡기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제까지 나의 성관념에 대해 줄곧 악평을 들어왔지만, 여기서는 무언가 한마디 하게 될 것 같다. 전날, 어떤 진실한 젊은이가 나에게 <나는 성이 영국을 부활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그에게 내가 할 수 있었던 대답은 <자네는 못 해.> 하는 정도의 것이었다. 아무튼 그에게는 성이 없었다. 가련하게도 그 젊은이는 자의식이 강하고 불안정한 자기애(自己愛)에 사로잡힌 성직자였다. 그는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로서는 사람에게 무언가가 있다 해도 정신 정도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조차 갖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렇다, 대개의 사람은 정신조차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인간의 존재란 다만 우롱당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굳게 자기 자신의 이기심 속에 틀어박혀 힘없이 우롱이나 진실을 찾아 헤맨다.

나는 이러한 총명한 젊은이가 나에게 성에 대해 묻거나 또는 이야기를 나누려고 망설여도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할 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다만 무서운 피로를 느낄 뿐이다. 그들에게 있어 성이란 단순히 여성의 속옷과 그 속옷을 주무르는 것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하여 온갖 사랑의 문학을 읽고 있다. 아프로디테의 상(象)이나 그림도 보고 있다.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들이 그러한 문제에 직접 부딪히면 그들에게 있어서의 성이란 천한 젊은 여자나 비싼 속옷이 되어 버리고 만다. 옥스퍼드 출신이든 노동자든 마찬가지이다. 멋진 피서지 같은 데서 도시의 귀부인들이 한 철 동안 댄스 파트너로서 젊은 등산가와 교제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구월이 끝날 무렵 피서객들이 이미 거의 떠나고 없을 때, 등산가인 젊은 존이라는 농부도 수도(首都)에서 온 여름 동안 그의 <부인'>었던 여자와 작별을 하고, 혼자서 빈둥빈둥 돌아다니고 있다, <이봐, 존! 그녀가 돌아가 버려서 쓸쓸하겠군 그래.> <그렇지도 않아> 하고 그는 말한다. <그녀가 좋았던 점은 고급 속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 정도일세>.

젊은이에게 성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전부이다. 성은 그들의 인생에 있어 생선회에 곁들인 파슬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으로 영국의 재생을 생각한단 말인가? 무슨 소리인가? 가련한 영국이여, 영국은 그 국민들에게 자기의 재생을 생각해 달라고 하기 전에 스스로 영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성을 재생시켜야 한다. 재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영국이 아니라 영국의 젊은이들이다.

사람들은 나를 야만스럽다고 비난한다. 나는 영국이 미개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미개하고 야만스럽다고 하는 것은 성에 관한 이 조잡한 어리석음과 무감각이다. 여성의 속옷을 여성의 가장 흥미있는 부분으로 생각하는 그런 남자야말로 미개하다고 할 만하다. 미개인이란 그런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상대편 남자를 자극하기 위해 외투를 세 벌이나 껴입었다는 천박한 여자의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다. 그 여자는 바로 생각대로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한다. 성 속에서 성 행동 그 자체와 속옷을 주무르는 그런 행위밖에 볼 수 없다면 나는 그 잡스러운 행위를 야만적이고 미개한 것 중에서도 가장 저급한 것이라 말하겠다. 그리고 성에 관한 한 우리 백인 문명은 조잡하고 야만적이고, 추할만큼 미개하다. 특히 영국과 미국이 그렇다.

그 증인은 현대 문명 최대의 해설자 가운데 한 사람인 버나드 쇼이다. 그는-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완전히 옷으로 몸을 가린 여자나, 팔도 다리도 다 드러낸 현대 여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옷을 입은 것은 성을 자극하고, 몸을 드러내는 것은 성을 죽인다고 말했다. 그리고 교황은 여자를 옷으로 완전히 폭 싸버리려 한다고 말한다. 쇼는 성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는 마지막 인간이 있다면 그것은 이 유럽의 최고위 성직자들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만약 유럽에 최고위 창부가 존재한다면, 그 여자야말로 교황에게서 성에 대한 것을 배우려는 유일한 인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의 비중 있는 사상가들의 경솔함과 저속함을 볼 수 있다. 노출이 심한 온 몸이 드러나게 하는 옷을 입은 현대의 여자들은 현대 남성의 마음에 그다지 큰 성적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다. 또 반대로 말해서 이런 남성 역시 여자들의 마음에 커다란 성적 감정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것은 어째서일까? 왜 몸을 드러낸 현대의 여자들은 쇼의 1880년대 옷으로 몸을 감싼 여자들에 비해서 성감을 자극하는 일이 훨씬 적은 것일까? 아마도 문제를 단순한 의복의 문제로서 생각하는 데에 어리석음이 있는 모양이다.

여자 그 자체가 활기차고 싱싱하다면 성 그 자체는 하나의 힘이 된다. 그것은 그녀의 이성을 넘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내버려두어도 자연히 성 특유의 마력을 방사(故射)하고 남자를 끌어, 남자에게 욕망의 원초적인 기쁨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여자는 될 수 있는 대로 자기를 감추고, 자기의 몸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녀의 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힘이고 그것이 그녀를 남자의 욕망 앞에 드러내 보이게 하므로 그녀는 스스로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감추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발랄하고 적극적인 성을 지닌 여자가 현대의 여자들처럼 자기 몸을 노출하면 남자들은 미친 듯이 그 여자에게 덤벼들 것이다. 마치 다윗이 바스시바(헷사람 우리아의 아내, 구약 역대상 11장 41절)에게 열중했듯이.

그러나 여자의 성에서 활기찬 유혹력이 없어지고 정지되거나 죽어버리게 되면, 여자는 이번에는 남자를 끌려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미 자신에게는 남자를 끌어들일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무의식적이고 즐겁던 모든 행위가 마침내는 의식적이고 귀찮은 것으로 변한다. 여자는 자기의 몸을 점점 더 노출하게 된다. 그리고 여자가 노출하면 할수록 남자는 점점 더 여성에게 성적인 반발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남자가 성적으로 반발을 느낀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스릴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는 현대에서는 대극적(對極的)인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남자는 반나체의 여자-거리에서 반나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여자-를 좋아한다. 그것은 멋진 일이고 반항과 독립의 선언이며 자유이다. 그런 모습이 유행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이것이 무성적(無性的-또는 반성적(理性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남자도 여자도 참다운 욕망을 느끼는 것을 피한다. 그들은 그 가짜를, 관념적 대용물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매우 복잡하다. 우리는 많은 종류의, 때로는 상반되는 욕망의 혼합물이다. 여자에게 성 따위는 잊어버리고 용감해지라고 선동하는 자가 한편으로 여자에게서 성이 상실된 것을 한탄하기도 한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일 경우가 있다. 사회적으로 똑똑하고 참한 남자라든가 성을 느끼게 하지 않는 남자를 매우 찬양하는 여자들이 한편으로는 그건 '남자'가 아니라고 몹시 싫어하기도 한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한 무리가 되어서 거짓 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도 인생의 어떤 시기에는 죽도록 증오심을 가지고 거짓된 성을 싫어할 때가 온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그것을 싫어하는 것은 스스로 그런 거짓을 세상에 퍼뜨린 사람들 자신인 것이다.

현대의 여성들도 그럴 생각만 있으면 눈만 내놓고 온몸을 옷으로 싸서 감출 수 있다. 아랫단에 테를 넣은 페티코트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릴 수도 있다. 그런 여성들은 현대의 반나체 여성들이 남자에게 주는 저 야릇하게 경화시키는 힘은 지니고 있지 않겠지만 그녀들 자신 역시 진정으로 남자들을 성적으로 끌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싸서 감출 성이 없다면 감춰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니 감추어 보았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남자는 흔히 속고 싶어 할 때가 있다. 감춘 그 밑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컨대 여자란 성적인 생기(生氣)를 찬양하며 흔들리는데, 그녀들의 의지로는 억누를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일 정도로 매력적인 경우엔 늘 자신을 싸서 감추려 하는 법이다. 옷으로 우아하게 몸을 싸려고 한다. 1880년에 스커트의 뒤를 붕긋하게 하기 위해 허리에 댄 장식류나 그와 비슷한 터무니없는 짓은 다가오는 무성(無性) 시대에 대한 경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성 그 자체가 하나의 힘인 이상 여자들은 온갖 종류의 매력적인 변장을 시도하고, 남자도 겉치장을 한다. 교황이 교회 안에서 여자가 피부를 드러내면 안 된다고 한 것은 성을 내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자의 불근신(不謹愼) 속에 여자의 감춰진 성이 폭로될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교황도 성직자들도 거리나 교회 안에서 여성이 맨살을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것은 남녀 쌍방의 마음속에 좋지 않은 모독적(冒瀆的)인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의 말은 옳다. 그러나 내가 옳다는 것은 노출이 성욕을 자극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있다 하더라도 극히 드문 일이다. 버나드 쇼도 그것쯤은 안다. 그러나 여자의 육체가 아무런 욕망도 자극하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비록 여자들이 교회에 대해 다소나마 경의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 하더라도 현대 여성들의 노출된 팔은 실제로 교회에 다니는 것과는 전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경박함, 냉담함, 세속적인 냄새를 자극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교회 안에서 보이는 여성들의 노출된 팔은 전통적인 것이지만 실은 불경(不敬)의 표시인 것이다.

카톨릭교회에서도, 특히 남부에서는 북부의 교회와 달리 성에 반대하지 않고, 쇼나 그와 같은 유(類)의 사회 사상가들처럼 무성적(無性的)이지도 않다. 가톨릭교회는 성을 인정하고 결혼을 생식을 위한 성적 결합을 바탕으로 한 비밀스러운 책(秘籍)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부에서의 생식은 북부와 달리 단순한 과학적인 행위나 사실이 아니다. 생식 행위에는 현재까지도 육욕적인 신비와 아득한 옛날에 주어진 중대성이 담겨 있다. 남자는 힘을 간직한 창조자이고 거기에 그의 빛이 있는데, 북부의 교회나 쇼적인 사소한 논리는 그 모든 것들을 벗겨 버리고 만다.

그러나 북부에서 사라져 없어진 이런 것들을 남부에서는 교회가 보존하려 하고 있다. 남부의 교회는 이것이 인생에 있어 기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알고 있다. 남자가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충실하고 만족된 인생을 보내고 싶다면 자기가 잠재적인 창조자이고 법의 제정자라는 기분을 나날의 생활에서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결혼이 영원한 것이라는 관념은 아마도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마음의 평화를 위해 필요할 것이다. 비록 이 관념에 숙명이라는 의미가 달라붙어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없어서는 안 되는 관념이다. 가톨릭교회는 사람들에게, 천국에는 결혼도 없고 이혼도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기 위해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는다. 교회는 결혼하면 그것은 영원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은 교회의 선언을 받아들인다. 그 운명과 그 선언의 권위를 인정한다. 성직자에게는 성이 결혼에의 시작이고, 결혼은 인간의 일상생활에의 시작이고, 교회는 보다 큰 생활을 위한 시작이다.

그러므로 성적 매력 그 자체는 교회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노출된 팔이나 천박하게 보이는 반성적(反性的)인 도전이라든가 '자유'라든가 냉담성, 불경(不敬) 같은 것이다. 성이 교회 안에서는 비천한 것이고 불경한 것인지 모르지만 결코 냉담한 것은 아니거니와 무신론적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 현대 여성의 노출된 팔은 냉담한 무신론을 대표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위험하고 속되며 악한 무신주의인 것이다. 물론 교회는 이것에 반대한다. 유럽에서 최고의 성직자는 아무튼 쇼보다는 성에 대해 조예가 깊다. 그들은 쇼보다도 인간의 본질적인 성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점에서 봐도 그에게는 천 년의 경험이 있다, 쇼는 하루 만에 뛰어 오른 것이다. 극작가인 쇼가 현대인들의 거짓 성을 풍자하고 뛰어오른 것이다. 그는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다. 가장 값싼 영화에서도 그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쇼가 현실을 사는 인간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성에 관해 언급할 수 없는 것도 확실하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그는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또 쇼는 자기에게 필적하는 존재로서, 성에 대해 의견을 밝혀야 할 존재로서 유럽의 뛰어난 창부(娼婦)의 장(長)-성직자의 장이 아니라-을 든다. 이 둘은 꼭 일치한다. 유럽 최고의 창부는 쇼와 비등한 성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양은 아니지만, 쇼와 마찬가지로 유럽 창부의 장은 남자의 위장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꾸며져 겉모습만 보이는 성에 대해 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쇼와 똑같이 그녀도 남자의 참다운 성에 대해-계절이나 1년의 리듬을 갖고 동지의 쓸쓸함과 부활제의 정열까지 띤 성에 대해-전혀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이에 대해 창부의 장인 그녀는 절대로 아무것도 모른다. 왜냐하면 창부가 되기 위해 그녀는 그것을 버려야만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쨌든 그녀가 쇼보다는 좀 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남자의 내적인 생명 속에 있는 심원한 율동적인 성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몇 번이나 그것과 마주 대한 일이 있었을 테니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헌이 창부란 궁극적인 면에서 성적으로 불능이고, 남자를 붙잡아둘 힘이 없고, 남자 속에 존재하는 깊은 충성의 본능에 대해 노여움을 품고 있다고 나타내고 있다.

세계 역사에 나타나 있듯이 남자의 본능적인 충성심은 불성실한 성적 방종의 본능보다도 좀 더 깊고 강력한 것이다. 온 세계의 모든 문헌은, 남자에게서나 여자에게서나 본능적인 충성심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남자나 여자가 얼마나 불안하게 이 본능의 만족을 추구하고 있는지, 또한 그들이 충성의 참다운 형(型)을 발견할 힘이 없다는 데에 얼마나 초조감을 느끼고 있는 지를 나타내고 있다.

충성에 대한 본능은 십중팔구 우리가 성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복합의식 중에서도 가장 깊은 것이다. 참다운 성이 있는 데에는 충성에 대한 정열이 숨겨져 있다. 창부는 그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창부는 그것과 맞서기 때문이다 그녀는 참다운 성을 갖지 않은 남자, 거짓 성 밖에 갖지 않은 남자만을 자기에게 붙들어 매어놓을 수가 있다. 더욱이 그녀는 그런 남자들을 경멸한다. 진실한 성을 가진 남자들을 보면 창부들은 그들의 참다운 욕망을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뛰어난 창부는 여러 가지를 알고 있다. 교황도 언제나 그것만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것을 알고 있다. 성의 문제는 모두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뛰어난 극작가로 평가되는 쇼는 성애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의 작품 속에는 이상한 공백이 있다. 그에게 있어 성은 충성과 일치되지 않는 것이고, 반대로 역시 충성과 일치되지 않는 것이 성이다. 그러므로 결혼에는 성이 없다. 성적으로는 무(無)이다. 성은 불성실이라는 형태로만 표현되는 것이며, 성의 여왕은 창부이다. 만약 결혼한 뒤 어떤 기회에 성에 대한 문제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부부 중의 한쪽이 누군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 결혼 생활을 불성실하고자 원했기 때문이다. 창부는 불성실이 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부인들은 그런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으며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극작가이자 사상가인 쇼의 가르침이다. 속된 대중은 그 가르침을 그대로 곧이듣는다. 성은 장난할 때밖에 필요치 않은 것이다. 성은 장난-불성실이라든가 간음-을 벗어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박할 만큼 자만심이 강한 쇼가 이 어이없는 이론을 끈덕지게 설명했기 때문에 이 말이 거의 사실처럼 여겨지게 되고 말았다. 성은 거의 존재성을 잃어버리고 기껏해야 매음과 경박한 간음 같은 것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결혼은 공허한 것이 되었다.

바야흐로 이 성과 결혼은 가장 중대한 문제이다. 우리의 사회생활은 결혼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사회학자들은 이 결혼이 재산 위에 서 있다고 말한다. 결혼은 재산을 지키고 생산을 자극하는 최상의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이 결혼의 전부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결혼에 관한 대혁명의 한복판에 서서, 결혼의 속박과 제한에 대해 열렬히 반항한다. 사실 현대인들이 지닌 불행의 사분의 삼은 결혼과 관련된 문제라고 하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혼 그 자체에 심한 증오를 인간 생활에 있어 한 제도로서의 결혼, 인간 생활에 부과되는 것으로서의 결혼에 강한 증오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부에 대한 반란보다 결혼에 대한 반란이 훨씬 강력하다.

사람들은 만약 결혼하지 않고 살아갈 길이 발견된다면 결혼 제도는 당연히 폐지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소비에트는 결혼제도를 폐지하려고 한다. 아니 이미 폐지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현대적'인 새로운 국가가 탄생한다면 그 국민은 반드시 소비에트처럼 될 것이다. 그들은 무언가 결혼을 대신하는 사회적인 어떤 대체물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고, 부부생활이라는 진절머리나는 멍에는 끌러 놓으려 할 것이다. 어머니나 아이들은 국가에서 보살펴 주고 여자들은 독립한다. 위대한 개혁안에는 모두 이 프로그램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결혼 제도의 철폐를 의미한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정말로 그것을 바라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는 여성의 절대적인 독립이라든가, 모성이나 아이들의 국가 보호라든가, 결혼의 불필요함을 진정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남자나 여자나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는 것일까?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남자들의 욕망은 이중구조라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얕은 욕망과 깊은 욕망, 개인적이고 표면적이며 일시적인 욕망과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내적이고도 비개인적인 큰 욕망. 순간순간의 욕망을 확인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다른 욕망, 보다 깊은 욕망의 존재를 확인하기란 어렵다. 큰 소리로 외쳐 대는 작은 욕망이 아니라 우리의 보다 깊은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사상가가 할 일인 것이다.

현대의 그리스도 교회는 적어도 인간 속에 존재하는 가장 크고 가장 깊은 욕망 몇몇을 승인할 뿐 아니라, 그 승인 위에 입각하고 있다. 그 욕망의 크기나 깊이를 채우려면 몇 년이란 세월이 필요하다. 아니 한평생 혹은 몇 세기가 걸릴지도 모른다. 그리스도 교회의 성직자들은 독신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며, 교회 그 자체는 베드로라든가 바울이라는 하나하나의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결혼의 필요성 위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결혼제도가 불안정해지고 이혼이 계속 증가하면 그리스도 교회는 붕괴된다. 영국 교회의 대대적인 몰락을 보라.

그 까닭은 교회가 인류의 결합 요소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에 있다.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인류 결합의 첫 단계 요소는 결혼의 굴레이다. 결혼의 인연, 혹은 결혼의 멍에는-어떤 표현이라도 상관없다, 독자가 좋을 대로 택하기 바란다-그리스도교 세계의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결합 요소인 것이다. 한번 그것이 끊어지면 세계는 그리스도교가 출현하기 이전의 압도적인 국가 권력의 지배 하로 되돌아가 버리고 만다. 로마에서 국가는 전능(全能)이었다 로마의 아버지들은 국가나 마찬가지였고 가족은 한 집안의 아버지가 다스리는 영토였다.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국가의 세습적인 재산이기도 했다. 그리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로마에 비해 재산이라는 영속적인 느낌이 적을 뿐이었다. 그리스에서는 오히려 그 찰나적인 소유라는 화려한 느낌이 있었다. 로마에 비해 그리스에서의 가족이라는 존재는 훨씬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가족이란 남자를 주축으로 성립되었다. 남자를 중심으로 국가를 만들고 있었다. 하기야 모계사회가 지금도 있기는 하다. 아니, 옛날부터 있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가족이 없는 국가도 있다. 성직자의 나라가 그것이다. 거기서는 성직자적 지배가 전부이고, 그것이 가족 지배로서도 기능을 발휘한다. 또 소비에트도 있다 거기서도 또한 가족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국가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을 직접 기계적으로 지배한다. 마치 거대한 종교 국가-이를테면 고대 이집트-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을 성직자에 의한 감독과 의식을 통해서 지배한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지금 말한 것과 같은 국가 지배 하로 돌아가기-혹은 전진하기-를 원하는지의 여부에 있다. 우리는 로마 제국 하에 있는 로마 사람처럼 되고 싶은가? 로마 공화국하의 로마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하는가? 우리는 가족과 우리의 자유라는 점에서 헬라스(그리스의 옛 이름)의 도시국가 시민처럼 되고 싶은가? 고대 이집트인이 처했던 성직자 지배와 의식 만능의 이상한 상황에 처해 보고 싶은가? 소비에트처럼 국가에 의해 생매장을 당하고 싶은가?

나는 그 어느 것도 싫다. 싫다고 한 이상,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인류 사회에 이룩한 최대의 공헌은 결혼 제도'라는 유명한 격언에 입각하여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결혼-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형태의 결혼-을 이 세상에 가져왔다. 그리스도교는 국가 지배의 내부에 작지만 가족의 자치(自治)라는 것을 확립했다. 그리스도교는 결혼이라는 것을 어떤 면에서 침해하지 못할 것, 국가도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남자에게 준 자유 가운데서 최선의 것은 아마도 결혼 제도일 것이다. 국가라는 왕국 내부에 그 자신의 작은 왕국을 만들어 준 것은 결혼이다. 그 위에 서서,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부정한 국가와 항쟁할 독립된 발판을 그에게 만들어 준 것은 결혼이다. 남편과 아내가 한두 사람의 신하를 거느리고, 사방 몇 야드의 영토를 가진 왕과 여왕이 되는 이것이 바로 결혼이다. 이야말로 참다운 자유인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나 여자나 아이들에게도 그것이 참다운 충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결혼 제도를 파괴하고 싶단 말인가. 만약 그것이 정말로 파괴되면 우리는 현재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국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우리는 국가-그것이 어떠한 국가이든 간에-의 직접적인 지배 하로 전락하고 싶은 것일까? 나는 싫다.

교회는 결혼이라는 것을 세례나 성찬 같은 비밀스러운 책(秘蹟)의 하나로서 생각해 냈다. 결혼을, 남자와 여자가 성에 의해 결합되고, 죽음으로밖에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비밀스러운 책으로 삼은 것이다. 또한 죽음으로 인하여 서로 떨어져도 그 결혼에서는 해방되지 않는다. 한 인간에 관한 한 결혼이란 영원한 것이다. 결혼이란 두 개의 불완전한 개체가 하나의 완전한 개체를 만들고 남자와 여자의 영혼을 짝 맞추어 생애를 통하여 그것을 함에 발전시키는 것이다. 결혼은 성스럽고도 불가침(不可侵)한 것이며 남녀는 교회의 정신적인 가르침에 따라 이 지상에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손을 맞잡고 결혼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남자의 인생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공헌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칫하면 놓치기 쉬운 것이다. 이것은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이 인생의 목적달성을 향하는 커다란 걸음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틀렸을까? 결혼은 남녀의 목적 달성을 위해 큰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결혼은 일종의 욕구불만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참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남녀 모두 이에 대답할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비국교파(非國敎派) 프로테스탄트의 사상을 택하여, 우리는 모두 독립된 각각의 서로 다른 존재이므로 우리에게 부과된 최고의 일은 우리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결혼은 확실히 그 목적을 위해서는 방해가 된다. 만약 내가 내 영혼만 구한다면 결혼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 그것은 성직자나 은자(隱者)들이 알고 있는 대로다. 또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한다면 이런 경우에도 결혼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게 좋다. 그것은 사도(使徒)나 성자(로者)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나의 영혼도 다른 누구의 영혼도 구하려 하지 않는다면? 나는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구세(救世)라는 것이 나에게 있어 불가해한 것이라면? '구원 받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그야말로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잘난 체하는 헛소리다. 그리고 내가 이 구세주니 구세니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른다면? 만약 내가 영혼을 평생토록 발전시키고 충실하게 해야 할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면? 지지하고 양분을 공급하고 발전케 하고, 나아가 마지막 목표를 향해 충실토록 해야 할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 비로소 나는 결혼 혹은, 결혼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또한 인간들의 일시적인 필요물이 아니라 영속적인 필요물이 무엇인가를 낡은 그리스도 교회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회는 결혼을 삶을 위한 것이라고 정했다. 영혼의 충족은 죽은 뒤로 연기되는 일이 없다. 결혼에 의해서 살아 있는 동안에 충족되는 것이다.

옛날 그리스도 교회는, 인생이 현세의 우리의 것이고, 살아야 할 것, 특히 충실하게 살아야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베네딕트의 엄격한 규칙,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난폭한 비양(飛揚)-그것들은 그리스도 교회의 변함없는 천국에서의 광휘였다. 생활의 리듬 그 자체는 시간 시간마다, 날마다, 계절마다, 해마다, 중요한 시기마다, 교회에 의해서 정해지고 사람들에 게 주어졌다. 그리고 거친 광휘도 이 영원한 리듬 속에 끼워져 있었다. 우리는 남부에서, 시골에서, 새벽녘이나 낮 또는 저녁에 미사나 기도 시간을 알리는 귀에 거슬리는 종소리를 들을 때 그것을 느낀다. 그것은 일상적인 태양의 리듬이다. 그것을 우리는 축제에서, 행렬에서, 크리스마스, 주현절(主體郞), 부활절, 성령 강림절(렬業降輸節)-세인트 존스 데이, 만성절(高資料) , 만령절(萬業郞)에서 느낀다. 이것이 1년의 회귀(回轉)인 것이다. 그것은 하지, 동지, 춘분, 추분점을 지나는 태양의 움직임이고 계절의 변화이다. 그것은 남녀의 내적인 리듬이다. 사순절(四旬郞)의 슬픔, 부활절의 기쁨, 성령 강림절의 경이, 세인트 존즈의 불, 만령절 무덤의 촛불, 크리스마스의 불이 켜진 나무, 그것들은 모두 남자와 여자의 영혼 속에 불타오른 리드미컬한 정서를 나타내는 것이다. 남자들은 모두 정서의 커다란 리듬을 남자답게 경험하고, 여자들은 그것을 여자답게 경험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와의 결합 속에서 그것은 완성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은 우주를 매일 새롭게 창조한다고 했다 살아 있는, 감정을 가진 영혼에게 있어 이 말은 진실이다. 새벽빛은 언제나 완전히 새로운 우주 위에 비쳐온다. 부활절은, 완전히 새로운 꽃이 되어 피는 신세계의 완전히 새로운 영광을 비춘다. 그리고 남자의 영혼이나 여자의 영혼도 모두 삶의 무한한 기쁨과 삶의 변함없는 새로움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남자도 여자도 일 년의 리듬에 상당하는 결혼 생활의 리듬 속에서 서로 일생을 통해서 신선한 존재인 것이다.

성(性)은 우주적인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의 균형력이다. 인력이고, 반발력이고, 중간점의 통과이고, 새로운 인력이고, 새로운 반발력이다. 언제나 다르고 늘 새롭다. 마음이 침울한 사순절의 긴 중성적(中性的)인 매력, 부활절 키스의 기쁨, 봄날의 성의 큰 잔치, 한여름의 정열, 가을의 느릿한 후퇴, 반동, 한탄, 다음에 오는 잿빛 시절, 추운 겨울날 기나긴 밤의 자극, 성은 일 년의 리듬을 통해 남성과 여성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지구에 대한 태양의 리듬 속에서 변해 간다. 아아, 만약 남자가 스스로를 일 년의 리듬에서, 태양과 지구와의 결합에서 떼어놓는다면, 그에게 그 이상의 파멸이 있을까? 아아, 만약 성이 해돋이나 일몰과 관계없는 것이 되고, 동지, 하지, 추분, 춘분과의 마술적인 관계도 사라지고 단순한 개인적인 감각이 된다면, 이보다 더한 파멸이 있을까!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우리는 지금 뿌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구로부터, 태양으로부터, 별로부터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비웃음으로 변해 있다, 그것은-가련한 꽃이여-우리가, 생명의 나무줄기에서 잡아 뜯어 우리의 문명 테이블에 올려놓은 사랑의 꽃병 속에서 계속 피어 있기를 기대한 때문이다.

결혼은 인간의 생활을 생각하는 실마리인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도는 태양이나 머리를 늘어뜨린 지구를 떠나서 결혼은 있을 수 없다. 궤도를 달리는 유성(遊星)과 항성(恒토)의 장려함을 떠나서 결혼은 있을 수 없다. 남자란 해질 때와 날이 밝을 때를 비교하면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닐까? 여자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남녀의 변해가는 조화와 그들의 변화의 불협화음이 인생의 숨은 음악을 낳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일생이 그런 것이 아닐까? 남자는 서른 살, 마흔 살, 쉰 살, 예순 살, 일흔 살로 나이가 들면서 점점 달라진다. 그의 곁에서 생활하는 여자도 변화한다. 그러나 그들의 변화 속에는 무언가 이상한 연결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청년기-아이를 낳는 시기, 개화기-활기찬 어린 시절, 여성의 인생이 변하는 시기-괴롭지만 새로운 인생의 출발이기도 한 시기, 정열은 기울기 시작하나 애정이 부드럽게 무르익기 시작하는 기쁨의 시기, 죽음이 다가오기 시작하는 고르지 못한 멍한 시기-이 시기에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사실상은 이별이 아니지만 멍한 이별의 불안을 느끼면서 바라본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균형, 조화, 완결같은 무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상호 작용이 있는 것이 아닐까? 리듬을 좇아서 국면(局面)에서 국면으로 이동해 가는 무언가 소리 없는 교향곡 같은 것 말이다. 각 악장(樂章)에서 전혀 다른, 전혀 다르지만 그래도 남자와 여자라는 두 종류의 이상하고 양립될 수 없는, 인생의 소리도 없는 노랫소리에 의해 만들어져 있는 교향곡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이것이 결혼이고 결혼의 신비인 것이다. 이 지상의 생애에서 스스로를 충족시키는 결혼이다. 천국에는 결혼도 없고, 결혼에 대한 굴복도 없다고 믿어도 좋을 것 같다. 그런 것이 모두 이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지상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디서도 이루어질 수 없다. 위대한 성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물론, 예수가 존재하는 것조차 결혼이라는 영원한 비적에 새로운 충족과 새로운 아름다움을 덧붙이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이 <그러나>라는 말은 우리의 가슴을 총알처럼 꿰뚫는다-결혼은 모두 기본적으로는 영원히 남근(男根) 숭배적인 것이다. 나날의 리듬, 다달의 리듬, 사철의 리듬, 해마다의 리듬, 십년 백년의 리듬을 가지고 태양이나 지구, 달이나 혹성이나 항성과 결부되어 있지 않은 것은 결혼이 아닌 것이다. 피와 피의 조화가 아닌 것은 결혼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는 영혼의 본체(本體)이고, 가장 깊은 의식의 본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를 유지하는 것은 심장과 간장에 의한 거시다. 피 속에서는 분별하는 것, 존재하는 것, 혹은 느끼는 것이 동일 불가분(同一不可分)인 것이다. 뱀도 사과도 거기에 분열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피에 의해 두 사람이 연결되어 있을 때만 결혼은 참다운 결혼이 된다. 남자의 피와 여자의 피는 두 종류의 영원히 다른 흐름이므로 그 둘은 결코 혼합되는 일이 없다. 그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두 종류의 피는 인생의 모든 것을 에워싸는 두 줄기의 강이고, 섹스 속에서 이 두 줄기의 강은 섞이지도 혼란되지도 않고 접촉되며 서로 생기를 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남근은 여자의 피의 골짜기를 채우는 피의 원주(圓柱)인 것이다-남자의 피라는 거대한 강은 그 강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거대한 피의 강을 느낀다. 그러나 그 둘은 서로 그 경계를 양보하지 않는다. 그것은 온갖 교류 속에서도 가장 깊은 교류인 것이다. 사실 모든 종교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위대한 신비의 하나이다. 사실 거의 모든 학문이나 예술이 나타내는 가장 위대한 것이고, 결혼이라는 신비스러운 의식의 최고의 성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이 성적 행위의 의미이다. 이 교류가 그런 것이다. 두 줄기의 강,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낡은 헛소리 같지만-의 접촉과 이 두 줄기의 강에 의한 메소포타미아 땅의 포위, 그리고 포위된 땅에는 극락이나 에덴동산 같은 것이 있고, 여기서 인간이 태어난다. 이것이 그 의미인 것이다. 이것이 결혼이다, 이 두 줄기 강의 흐름, 이것이 참된 결혼이며 이것 이외의 결혼은 없다. 그것은 모든 종교가 알고 있는 일이다.

두 줄기 피의 강, 이것이 바로 남자와 여자인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게 구별된 두 줄기의 영원한 흐름이다. 그리고 그 두 줄기는 접촉하고, 교류하고, 서로를 새롭게 존재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그렇게 하면서 미묘한 경계를 침범하는 일도 없고, 혼란스러워하는 일도, 섞이는 일도 없다. 그리고 남근이 그 두 가지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인 것이다. 두 줄기 강을 하나로 만든다. 그 이중성을 떤 흐름에서 영원히 하나가 되는 흐름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두 줄기를 일생을 통해서 점차 하나로 만드는 것, 그것이 시간, 혹은 영원을 낳은 최고의 성과인 것이다. 거기서부터 인간적인 것 모두가 나타난다. 어린아이, 아름다움, 좋은 작품, 그러한 온갖 참다운 인간의 창조물이 나타난다, 그리고 우리들이 아는 한 신의 뜻도 여기에 있다. 신의 뜻은, 단일성(單一性)이 생겨나 그것이 일생 동안에 이루어지게 되는 데에 있고, 이 인간성의 위대한 이중의 피의 흐름 속에 단일성을 생기게 하는 데에 있다.

남자도 죽고 여자도 죽는다. 그리하여 분리된 영혼은 조물주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을 누가 알 것인가. 그러나 결혼한 남녀의 피의 단일성은 인간성에 관한 한 우주를 완결한다. 태양의 흐름과 별의 흐름을 완성시킨다.

물론 여기에는 상대물, 즉 거짓이 존재한다. 오늘날의 거의 모든 결혼은 거짓이다. 현대인은 단순한 개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현대에서는 두 남녀가 서로의 개성에 의해 '감동'했을 때 결혼이라는 것이 이루어진다. 두남녀가 가구, 책, 스포츠, 오락 등에 같은 취미를 가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고 생각했을 때, 서로 상대의 정신을 존중했을 때 그들은 결혼을 한다. 그리고 이 정신과 인격의 근친성(近親性)은 남녀 간의 우정의 기초로서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결혼의 기반으로서는 치명적이다. 그 이유는, 결혼은 불가피하게 성생활을 발생케 하고, 성생활-지금도, 옛날에도, 미래에도-은 남녀의 지적이고 개성적인 관계에 대해 어딘지 모르게 적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개성의 결혼은 소름이 끼칠 듯한 육체적 혐오로 끝난다는 것이 거의 공리(公理)처럼 되어 있다. 처음에는 서로 헌신적으로 대해 왔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자기들도 설명할 수 없는 혐오감 때문에 고민한다. 그들은 그와 같은 상태가 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것을 감추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특히 서로에게는 가련할 정도로 감출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개성이 강한 사람들은 결혼 생활 속에서 축적되는 분노가 종종 미칠 것 같은 지경에까지 증대되어 버린다. 모든 것이 분명한 이유도 없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 참다운 이유는, 신경이나 정신이나 개인적 흥미가 갖는 배타적 공감이 성에 있어서의 피의 공감에 적대한다는 데 있다. 현대의 개성 숭배는 두 이성간의 우정에 있어서는 훌륭하지만 결혼에 있어서는 치명적이다. 현대인들은 결혼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일반적으로 말할 수가 있다. 그러는 편이 자기의 개성에 대해 충실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을 하건 하지 않건 그 치명적인 사건은 생긴다. 공감이나 사랑이 개인적인 것뿐이라면 영혼은 조만간 노여움이나 증오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그것은 좌절감과 피의 공감, 피의 접촉이 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신 생활에서는 이 부정이 하나의 노여움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대에서도 우리가 벼락을 못 피하듯이 이것을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영혼 현상의 일부인 것이다. 중요한 점은 성 그 자체가, 성적 만족이라든가 성적충족과는 관계없이 개성과 개인적인 '사랑'을 위해 완전히 소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성생활은, 피의 결혼에 있어서보다 아마도 '개인적' 결혼 쪽이 더 활발할 것이다. 여자는 영원한 연인이 될 만한 남자가 없는가 하고 한숨을 쉰다. 그리고 그녀는 '개인적' 결혼에서 그런 상대를 얻는 수가 많다. 그러나 남자의 욕망에는 끝이 없고, 더욱이 그것은 목적도 없고 무엇을 충족시키는 일도 없기 때문에 그녀는 남자를 깊이 증오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성을 말하면서 내가 저지른 과오이다, 나는 언제나 성이란 피의 공감과 피의 접촉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추측해 왔다. 기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사실은 현대의 성의 전부는 순수한 신경의 문제이다. 차디찬, 피가 통하지 않는 신경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성이다. 그리고 이 하얗고, 차갑고, 신경적, 시적(時的-개인적인 성-현대인이 알고 있는 성이란 이것뿐인 것이다-은 매우 기묘한 생리학적, 또는 심리학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 두 줄기 피의 흐름은 남자와 여자 속에서 서로 접촉한다, 그것은 피의 정열과 피의 욕망적인 충동 속에서의 접촉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피의 욕망적인 충동 속에서의 접촉이 적극적이고, 피 속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데 반해 이 신경적, 개인적 욕망의 존재 속에서 피의 접촉은 불화를 끌어들이고 파괴적인 것이 된다. 그 결과로서 피는 희고 가난한 것으로 변해 간다. 개인적인, 또는 신경적이거나 정신적인 성은 피에 대해 파괴적인 분해 작용을 한다. 그에 반해 따뜻한 피의 욕망 속에서의 교접은 신진대사의 작용을 한다. 신경적인 성행위의 분해 작용은 일시적으로는 일종의 황홀 상태를 만들어 내고 의식을 고양시킬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알코올이나 마약의 힘처럼 혈액 중에 있는 어떤 종류의 혈구(血球)가 분해된 결과이고 빈곤화에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현대인이 에너지를 상실하는 대부분의 이유 중의 하나이다. 원기를 회복케 하고 기분을 일신케 해야 할 성행위가 우리를 피로케 하고 쇠약케 한다. 그러므로 젊은이가 '성에 의한 영국의 갱생'이라는 사고방식에 따라가지 못한다 해도 그의 기분은 알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현대의 성은 모두 개인적이고 신경적이며, 그 결과는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성생활이 파괴적 결과를 갖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 파괴적 결과야말로 자위행위보다는 조금 낫다는 정도이다. 후자는 더욱 치명적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나의 비판자들이 내가 높이 제창하는 성이라는 사고를 어떻게 공격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까 한다. 그들은 성에 대해서는 하나의 형태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서 성은 바로 단 하나의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신경적, 개인적, 파괴적인 '하얀' 성이다. 물론 이와 같은 것은 날조된 허위는 될 수 있겠지만 희망에 찬 것은 될 수 없다. 나는 이와 같은 성에서 영국을 구출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동시에 성이 없는 영국의 갱생이라는 생각에도 희망을 품을 수 없다. 성을 상실한 영국에 희망을 느낄 수는 없다. 그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나는 성의 중요성을 설명해 왔는데, 실은 현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성은 내가 생각하는 종류의 성과는 전혀 다르다. 이 점에선 내가 어리석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성에 등을 돌리고, 영국의 갱생이 성의 완전한 무시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믿을 수는 없다. 성이 없는 영국이란 나에게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하다.

그것과는 다른 성-남녀 사이에 싱싱한 생명을 회복케 하는 고리를 맺어주는 따뜻한 피의 성-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것을 회복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회복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불가능하다면 우리보다 젊은 세대가 그것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멸망해 버린다. 왜냐하면 미래로 가는 다리는 남근이고 거기에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의 '신경적' 사랑의 빈약하고 예민한 거짓 남근은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인생에 대항하는 새로운 충동은 피의 접촉 없이는 결코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신경적이고 부정적인 반동이 아니라 참되고 적극적인 피의 접촉이 없이는 얻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남녀 간에는 귀중한 피의 접촉이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도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동성애적인 접촉은 비록 그것이 남녀 간의 불만족스런 신경적 성에서 오는 악성 반동의 산물이 아닌 경우에라도 보조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영국이 갱생되어야 한다면-여기서 나는 갱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느 젊은이의 말을 인용했는데(이 갱생이라는 말은 그가 사용한 말일 따름이다)-그것을 이루어주는 것은 새로운 피의 접촉, 새로운 결혼일 것이다 그 갱생은 성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남근적인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남근은 남자 속에 있는 신(神)과 같은 생명력을 가진 유일하고도 오래 된 상징이자, 직접적인 접촉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혼의 쇄신도 될 것이다. 결혼은 참다운 남근적 결혼이 될 것이다. 또한 나아가 그 결혼은 율동적으로 움직이는 우주와 관련을 갖는 것이 될 것이다. 우주의 율동에서 우리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고 벗어난다면 우리의 생명은 완전히 고갈되어 버릴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 교도들은 옛날 이교도들의 우주적 의식의 리듬을 전멸시키려고 꾀했는데,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혹성과 황도대를 멸망케 했다. 아마도 점성학이 그 무렵 이미 단순한 점술로 타락해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일 년 동안의 온갖 축제를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교회는 인간이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회귀하는 해나 달이나 지구에 의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성스러운 날이나 축제일을 거의 이교도들의 것과 마찬가지로 부활시켰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농부들의 생활도 이교도 농부들과 비슷해졌다. 해돋이-정오-일몰이라는 하루의 태양의 움직임 가운데 중대한 순간에는 일손을 멈추고 예배를 한다. 그러고 나서 새로운 휴일-이것도 태고의 칠일 주기(七日週期) 중의 하루이다-그리고 신의 죽음과 부활의 날, 부활절, 성령 강림절, 바프테스마의 요한 축일(6월 24일), 11월의 죽음과 무덤의 정령들, 크리스마스, 그리고 세 박사의 날. 과거 몇 세기 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교회 안의 이 리듬 속에서 생활했다. 커다란 인간 집단이 종교적 리듬을 잃었을 때, 그 사람들은 죽어 있다. 이제 희망은 없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티즘이 나타나자 그것은 인간의 생활 속에 있던 연단 위의 종교적, 의식적 리듬에 큰 타격을 가했다. 비국교주의는 다시 이 관례적인 행사를 거의 끊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영국에는 가난하며 눈이 먼, 고리가 끊긴 인간밖에 없다. 회전하는 우주를 염두에 두고 보다 위대한 우주의 법칙에 영원히 굴복하려 하는 인간의 영원한 요구를 만족시키려 해도 영국인들에게는 정치와 은행 휴업밖에 없는 것이다. 결혼 역시, 인간의 가장 큰 필요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우주 법칙의 지배를 잃고 같은 피해를 입고 있다 우주의 리듬, 이것이야말로 언제나 변함없이 인생을 지배해야 할 것이다. 인류는 우주의 리듬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며 결혼의 영원성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지금 말한 것은 모두 나의 소설-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대한 후기(後記)라든가 회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란 별로 없다. 그러나 그 얼마 안 되는 필요물에는 깊은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그다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인생을 보내는 동안 잘못하여 우리의 보다 깊은 필요물을 일종의 광기 속에 잃어버리고 말았다, 인간이나 인간들에게 얼마 안 되는 필요물에 관련된 조그만 도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슬프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이 도덕에 의해서이다. 그러나 보다 깊은 도덕도 존재한다. 이것은 모든 여성, 남성, 국가, 민족, 계급에 관계되는 도덕이다. 이 위대한 도덕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인류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 그것은 인간의 보다 위대한 필요물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종종 비소(卑小)한 필요물의 비소한 도덕과 대립한다. 비극의 의식은 우리에게, 인간에게 중요한 필요물은 죽음의 지식과 경험이라고 가르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몸속에 숨어 있는 죽음을 알 필요가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비극의 전기(前期)나 비극의 후기보다 큰 의식은 우리에게-우리는 아직 비극의 후기에는 도달하지 않았지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과 사()의 완전한 리듬을 영원히 새롭게 해가는 일이다. 태양에 의한 일 년이라는 리듬, 육체에 의한 일생이라는 일 년, 하늘에 있는 별의 큰 일 년, 영원한 영혼의 일 년, 그와 같은 것들의 리듬을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해두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필요하고, 우리에게 부과된 가장 중요한 명령인 것이다. 그것은 마음과 영혼의 요구이고, 육체와 정신의 요구이다. 모든 것의 요구이다. 이와 같은 요구를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찾는다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Word(복음)Logos(신의 말, 그것이 몸으로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Utterance(맡겨진, 또는 씌어진 말)라고 하지만 그것을 채울 수는 없다. 복음은 이미 주어져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참다운 주의를 거기에 기울이는 것뿐이다.

그러나 누가 우리를 행위 아래로 불러낼 것인가? 사계(四季)와 해()의 위대한 행위에, 영혼의 회전의 행위에, 남자와 함께 하는 여자의 한평생의 행위에, 달의 운행이라는 조그마한 행위에, 태양의 운행이라는 커다란 행위에, 하늘에 있는 별의 보다 큰 최대의 행위에, 누가 우리를 연결 지을 것인가? 그것은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인생의 행위인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배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아, 우리의 현상을 보라. 우리는 말로는 완전할지 모르지만 행위에서는 착란되어 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의 '조그마한' 인생의 죽음에 대한 준비와, 회전하는 우주에 접촉한 보다 큰 인생 속에 환생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만 한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관계되는 문제이다. 우리는 질서 정연하고 조화된 우주, 광대한 우주에서 싱싱한 양분을 빨아들일 수 있는 관계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 길은 나날의 의식(儀式)을 통하는 데에 있고, 다시금 눈 뜨는 데에 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새벽과 정오와 일몰의 의식을 행해야 한다. 불을 켜고 물을 따르는 의식을 행하고, 최초의 호흡, 마지막 호흡의 의식을 실행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과 가정의 용무이고 나날의 의식의 하나이다. 찼다가 기우는 달, 새벽별, 저녁별의 의식은 남자와 여자에게 있어서 각각 다를 것이다. 다음에 사철의 의식이 있다. 행렬이나 춤 속에 영혼의 드라마나 정열이 구현되어 있다. 이것은 공동 사회를 위한 의식이다. 남자들과 여자들, 사회 전체가 결속(結東)된 행위이다. 또 별의 일년간에 포함된 커다란 여러 가지 의식은 국가나 전 국민의 것이다. 이런 갖가지 의식으로 우리는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의식을 우리의 요구에 합치하도록 발전시켜야 한다. 현실은 우리 스스로의 커다란 요구의 충족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파멸에 직면해 있고, 내적인 영양 보급과 신생(新生)의 위대한 근원에서, 영원히 우주에 계속 흐르는 근원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다. 인류는 죽음에 임박해 있다. 허공에 뿌리를 드러낸 거대한, 뿌리째 뽑힌 나무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금 우주 속에 심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태고의 형태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태고의 형태를 다시금 만들어 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복음을 설명하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복음은 우리가 모두 구원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가져온 것이다. 오늘날 세상을 내다보면 인간성은 죄(그것이 어떠한 것이든)에서 구제되는 게 아니라 거의 완전히 상실되고-생명을 느끼지 않게 되고-있다. 이미 무()에 가깝고, 절멸에 임박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길고 긴 길을 돌아가야만 한다. 관념론자의 사상보다도 옛날로, 플라톤보다도 옛날로, 삶의 비관론보다도 옛날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우리들 자신의 다리로 서도록 해야 한다. 관념에 의한 구원의 복음과 육체로부터의 도피는 인간 생활의 비극과 우연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구원과 비극은 동일물이다. 그리고 그 둘은 지금 문제되고 있는 양면이다.

아직 관념론자의 종교나 철학이 나타나기도 전에 인간은 이미 비극의 여행길에 오르고 있었다. 인류의 최근 3천 년간의 역사는 관념론, 실체의 결여, 비극에의 여행이었으며, 지금 그 여행이 막 끝난 참이다. 그것은 극장에서 보는 비극의 종말과 비슷하다. 무대에는 시체가 사방에 흩어져 있다. 아니, 시체보다도 심하다. 의미도 없는 시체가 흩어져 있다. 그리고 막이 내린다.

그러나 인생의 장면에서는 막은 절대로 내려지지 않는다. 인생에서는 시체가 힘없이 쓰러지면 누군가가 그것을 치워야 한다. 누군가가 그것을 실어 내야만 한다. 그것은 명백하다. 비극적인 관념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남은 주역(主役)들은 극도의 피로에 싸여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살아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페시미즘에 해를 입고, 인생은 불모의 투쟁에 지나지 않으므로 목숨을 걸고라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대 관념론자들이 파괴해 버린 위대한 관계를 다시금 수립해야 한다. 부처, 플라톤, 예수, 그들 세 사람 모두 인생에 관해서는 완전한 페시미스트였다. 그들은 행복이라는 것은 생활에서-나날의, 해마다의, 계절마다의 탄생, 죽음, 결실의 생활에서-자기를 추출하고 '불변' 혹은 영원한 정신 속에 사는 데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거의 삼천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 네 계절의 리드미컬한 생활에서도 탄생과 죽음, 결실에서 우리가 거의 완전히 추출되어 본들 지금 우리에게는 이 같은 추출은 행복도 해방도 아니고 무(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무의 관성(慣性)을 가져온다. 위대한 구세주나 설교사들은 우리를 생활에서 떼어놓은 데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비극적인 부기(附記)였다.

우리에게 있어 우주는 죽어 있다. 어떻게 해야 우주를 다시 생명력으로 충만케 할 수 있을 것인가? '지식'이 태양을 죽이고, 그것을 흑점이 있는 가스의 덩어리로 변하게 했다. '지식'이 달을 죽이고 그것을 천연두의 곰보 같은 차디찬 분화구를 가진 죽은 조그만 땅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기계의 진보가 지구를 죽이고 이것을 얼마간 울퉁불퉁한, 여행을 위한 지표(地表)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상태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마음을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으로 채워주는 구체(球體)를, 영혼의 하늘의 위대한 구체를 되찾을 수가 있을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하면 아폴로, 아티스(소아시아 프리지아의 신), 데메테르(농업과 결혼의 여신, 피시파니(지옥의 여왕), 저승의 홀 등을 되찾을 수가 있겠는가. 금성이라든가 오리온성좌의 별을 어떻게 하면 그 신비로운 전설 속에 잠겨 있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런 것을 되찾아야 한다. 그런 것은 우리의 영혼이, 우리의 위대한 의식이 살고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성과 과학의 세계에서는 달은 죽은 땅의 세계이고, 태양은 흑점이 있는 가스 덩어리라고 한다. 이것이 추상(抽象)된 정신이 살게 된 메마른 불모의 조그마한 세계인 것이다. 우리의 작은 의식의 세계, 이 세계를 우리는 하찮게 일을 따지는 방관자적인 기분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떼어 버렸을 때 그처럼 세상을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을 천하게, 먼 기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잃지 않고 세계를 인식할 때에는, 지구가 히아신스 같다든가, 하계적(下界的)이라고 생각하고, 달은 우리에게 우리의 신체를 기쁨으로 준다든가, 그것을 훔쳐가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태양이라는 거대한 황금의 사자가 으르렁 거리기도 하고 암사자가 새끼를 핥듯이 우리를 핥아서 우리를 대담하게 만들기도 하고, 혹은 잔뜩 화가 난 사자처럼 발톱을 세우고 우리에게 덤벼든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는 길은 두 길이 있고, 지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두 가지 중의 하나는 방관적 방법, 다시 말해서 지능적이고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방법이고, 또 하나는 합체적(合體的)인 방법, 다시 말해서 종교적이고 시적인 방법이다. 그리스도교는 드디어 프로테스탄티즘에서 우주와의 합체성을 잃고, 육체와의 합체성도 잃고, 성, 정서, 정열, 지구, 태양, 별과의 합체성도 잃었다.

한편, 관계는 삼중 구조가 되어 있다. 우선 첫째로 생(生)이 있는 우주와의 관계, 둘째로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 셋째로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있다. 세 가지가 다 단순한 정신이나 마음의 관계가 아니라, 피의 관계이다. 우리는 우주를 물질과 세력 같은 것으로 분해해서 인식하고, 남자와 여자를 따로따로의 인격-서로 관계없는 합체 불가능한 개체-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때문에 지금 말한 세 가지 관계는 모두 정체(正體)가 없는 죽은 것이 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 대 인간의 관계만큼 절망적으로 되어 버린 것은 없다. 오늘날 인간들이 서로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를 철저히 분석해 보면, 그들은 결국 서로를 위협적인 존재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기묘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지적이고 관념적으로 될 수록 다른 인간의 육체적 존재를 위협으로 느끼게 된다. 그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서 이다. 내 곁에 모여드는 인간은 모두 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아니, 그 이상이다. 나의 존재까지 위협하고 있다.

우리의 문명은 이런 추한 사실을 기반으로 해서 그 위에 서 있다. 전쟁 소설의 광고문에, 이 책은 <우정과 희망, 진흙과 피'의 서사시다> 라고 씌어 있었는데 그 의미는 물론 우정과 희망이 마지막에는 진흙과 피투성이가 된다는 것이다.

성과 육체의 대개혁 운동이 플라톤에 의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것은 '관념'을 목표로 하고 이 '정신적' 방관자적 지식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었다. 성은 위대한 통합자이다. 성의 크고 느긋한 진동 속에서 인간을 합체적으로 함께 행복하게 하는 것은 심장의 따뜻함이다. 관념론자의 철학과 종교는 이것을 죽이려고 용의주도한 출발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한 대로 했다. 그들은 목적을 달성했다. 우정과 희망의 마지막 커다란 분발은 진흙과 피 속에서 눌리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인간은 모두 고립된 작은 실재(實在)로 화하고 있다. 지금 <친절함>은 일상생활에서 입으로만 하는 질서 -누구나가 '친절해야 한다'-로 되어 있지만 이 친절함 밑에는 냉랭한 심장이, 심장의 결여가, 냉담성이 있다. 참으로 황량하기 짝이 없다. 인간은 모두 다른 인간에게 있어 위협인 것이다.

인간끼리는 위협이라는 형태로 상대편을 안다. 개인주의는 승리를 얻었다. 만약 내가 정말로 한 개인이라고 한다면 다른 모든 존재, 특히 다른 모든 인간들은 내게 대한 위협으로서 나와 대립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특성이다. 우리는 모두 남에게 극도로 예의바르게 대하고 있고 선인(善人)이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서로를 무서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협감과 공포감을 동반한 고립감은 일체감(一體感)이라든가 동포와의 공동사회 감각을 희박하게 하고 개인주의라든가 고립된 개성이라는 감각이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다. 이른바 '교양 있는' 계급은 '개성'이라든가 개인주의를 맨 먼저 발달시키고, 또 맨 먼저 이 무의식적인 위협과 공포 상태로 떨어져 간다. 노동자 계급은 일체성과 합체성의 낡은 피의 온기를 수십 년간은 간직하는 법이나 이윽고 그들도 그것을 잃는다. 그 다음에는 계급의식이 차차 퍼진다. 계급간의 증오가 퍼진다. 계급간의 증오라든가 계급의식으로 인해 낡은 합체성이나 낡은 피의 온기가 허물어지게 되어 사람은 모두 자기를 고립된 존재로밖에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다음에 대항, 투쟁을 위해서 서로 적대시하는 그룹이 생긴다, 시민 투쟁이라는 것은 자기주장을 위한 필수 조건이 된다.

이것 역시 오늘날 사회생활에 있는 비극이다. 옛 잉글랜드에서는 기묘한 피의 연결이 계급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지주나 지방 명사들은 거만하고 포악해서 부정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어떤 점에서 민중들과 일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어느 정도 민중들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필딩이나 디포에서 본다. 그러나 비소(卑小)한 제인 오스틴에게서는 그것이 사라져 버렸다. 이 노처녀는 이미 인물을 쓰지 않고 등장인물을 '개성화'하고 있다. 합체적 인식이 아니라 방관자적 인식을 행하고 있다. 나는 그녀가 골수에 사무치도록 불쾌하다. 그녀는 영국의 나쁘고 천한 속물적인 면을 대표하고 있다, 반대로 필딩은 선과 관대함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에서 영국적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대해 언급하기로 하자. 이 작품에는 클리포드 경이라는, 주위의 남자들이나 여자들과의 관례적인 사교 외에는 모든 연관을 상실한 순수한 하나의 개성이 등장한다. 그에게는 모든 온기가 상실돼 차갑고 비인간적이기조차 하다. 그는 우리 문명의 순수한 산물이지만 세계의 위대한 인간성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관례에 어긋나지 않는 친절은 갖추고 있다. 그러나 그는 따뜻한 동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만의 존재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여자를 자기의 것으로 붙들어 놓지 못한다.

또 하나 등장하는 사람은 인간의 온기는 여전히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쫓겨서 파괴에 직면하고 있다 그를 쫓는 여자가, 정말로 그와 그의 생명적인 의미를 지지하고 있는지 어떤지조차 의문이다.

나는 클리포드를 의식적으로 반신불수가 된 남자로 썼느냐, 그것은 상징이라고 생각하느냐는 하고 종종 사람들에게서 질문을 받았다. 문학상의 친구들은 클리포드를 건전하고 능력 있는 남자로 설정해 두는 편이 좋지 않았을까 하고 말한다. 그렇게 해놓고, 그런데도 아내가 달아났다고 하는 편이 좋았을 거라고 한다.

그 <상징>이 의식적이었는지 어떤지 나는 모른다. 내가 맨 처음 클리포드를 그렸을 때에는 분명히 그렇지는 않았다. 처음에 클리포드와 코니를 만들어 냈을 때, 나는 이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왜 등장했는지 나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단순히 등장했을 뿐이고, 나는 그들에 대해 아무런 깊은 생각도 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전편(全篇)을 세 번이나 고쳐 썼다. 처음으로 원고를 다 쓰고 이것을 읽었을 때, 나는 클리포드의 불구가 오늘날 그가 속한 계급의, 클리포드와 같은 남자들의 거의 전부에게서 볼 수 있는 마비, 깊은 정서적 정열적 마비를 상징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클리포드를 하반신 불수의 남자로 설정하는 것이 아마도 코니에 대해 공평치 못하리라는 것도 나는 생각했다. 그러한 남편에게서 달아난다는 것은 더욱 코니의 사랑의 도피행을 속되게 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저절로 그렇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것을 상징이라고 하거나 안 하거나 별문제로 하고, 이 이야기는 써나가는 동안에 저절로 이렇게 된 것이다.

지금 나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완성된 지 약 이 년 만에 이것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해석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소설의 배경으로서 필요하리라고 생각되는 나의 신념을 독자에게 알리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 소설이 사회의 관례를 무시하고 쓰여진 것만은 자명하다. 그러므로 결국 이 관례를 무시한 자세를 밝힐 어떤 이유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속인(俗人)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쓴 것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금기로 되어 있는 어휘를 썼다 해도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남근적 현실에서 '승화(昇華)‘의 오점을 취급하기 위해서는 역시 남근적 언어, 비속한 말을 쓸 필요가 있다. 남근적 현실에 대한 최대의 모욕은 이 <보다 높은 차원으로의 승화>이다. 그러므로 소설 속의 상류 계급 부인이 산지기와 결혼했다 하더라도-소설 속에서는 실제로 결혼하지 않았지만-그것은 '계급 혐오' 때문이 아니라 '계급의 거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얼마 전 해적판에 대한 글을 쓰고도-그 일부분에 대해서이지만-원작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은 데 대한 불평스런 편지를 받았다. 원작의 초판은 피렌체에서 발행되었는데, 보드 지(紙)의 딱딱한 양장본으로 장정되어 있다. 표지의 색은 짙은 자색인데, 표지 위에는 나의 표시인 불사조가 검정색으로 인쇄되고, 표지 뒤에는 흰 종이가 붙여져 있다. 종이는 질이 좋은 노르스름한 이탈리아 종이이다. 인쇄가 잘 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면 보통 수준이다. 제본도 피렌체의 조그마한 제본소에서 했기 때문에 역시 그 정도다. 특별히 숙련된 제본도 아니다. 그러나 기분 좋게 만들어진 책이다. 흔히 말하는 고급 책보다는 잘 되어 있다.

그리고 만약 이 책에 오자(誤字)가 많다 하더라도-실제로 있지만-이것은 이 책이 이탈리아의 조그마한 인쇄소에서-가족 단위로 운영되는 그런 인쇄소에서 조판, 인쇄되었으므로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곳 식자공들은 아무도 영어를 몰랐기 때문이다. 식자공 중 아무도 영어를 아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여러 가지로 얼굴을 붉힐 만한 장면도 모르는 채 책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교정지는 괴상한 꼴이 되었다. 식자공이 몇 페이지에 걸쳐 꽤 잘한 데도 있지만, 그들이 술이라도 마시고 한 데는 언어가 기분 나쁜 죽음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아무튼 영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만약 오식(誤捨)된 데가 아직 좀 남아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것만으로 끝난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한번은 어떤 신문이 이 책을 조판(組版)한 조판공이 속아서 했다는 동정적인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속이다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 조판공은 흰 콧수염을 기른 남자인데, 그때 마침 두 번째의 아내를 맞아들였을 때였다. 그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이런 말을 들었다. 이 영어책에는 이러저러한 말이 씌어 있고, 어떤 종류의 것이 묘사되어 있다. 그런 일이 하기 싫으면 거절해도 할 수 없다 라고. 그러자 그는 '어떤 내용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야기를 듣고 그는 과연 피렌체인다운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난 또 뭐라고, 겨우 그런 말인가요? 그건 우리가 매일 하는 것 아닙니까? 그에게 있어 문제는 단지 그것뿐이었던 것 같다. 인쇄물의 내용은 정치적인 것도 아니고 도리에 벗어난 일도 아니므로 별로 깊이 생각할 게 없었던 것이다. 매일 행해지는 일이고 당연한 일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출판하기까지는 매우 힘이 들었다. 그토록 훌륭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이었다. 그 인쇄소에는 이 소설의 반을 조판할 정도의 활자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선 반을 짜서 일 천부의 분량만 인쇄하고서 다시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보통 종이에 이백 부를 찍었다. 이것이 부수는 적지만 제2판이 되었다. 거기까지 하고 해판(解版)하여 나머지 반을 짰던 것이다.

다음에는 배부하는 일도 고투(苦鬪)였다. 미국의 세관에서 순식간에 걸리고 말았다. 다행히 영국에서 걸리기까지에는 약간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사실상 제1판은 거의 전부-적어도 8백 부는 확실히-영국에 도착했을 것이다.

다음에 저속한 언론 공격의 폭풍이 닥쳐왔다. 그러나 이것은 피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뭘, 그런 건 매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조그마한 이탈리아의 조판공은 말했다, '천만에! 무서운 일이다‘ 하고 영국의 신문은 고함을 쳤다. '고맙소, 성을 진정으로 성적으로 쓴 책을 나는 가까스로 보게 되었소. 나는 성이 상실된 책만 읽었기에 아주 싫증이 났었소' 하고 피렌체의 가장 훌륭한 시민의 한 사람인 이탈리아인이 내게 말해 주었다. '난 잘 모르겠어, 도무지 모르겠어. 좀 지나친지 어떤지' 하고 어떤 소심한 피렌체의 비평가는 말했다. 그도 이탈리아인이었다. '여보게, 로렌스, 정말 거기까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하자 그는 생각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그렇죠. 한 남자는 머리가 영리한 바람둥이고, 다른 한 남자는 성 불구자니까요.' 하고 어떤 미국 여성은 소설에 등장하는 두 남자를 비평했다. 그러니까 코니는 나쁜 제비를 뽑은 게 아닐까, 이번에도 또 말예요!

posted by 푸른글2
: